정간과 12정맥들
장백정간(長白正幹)
북쪽으로 두만강, 남쪽으로 어랑천·수성천의 분수령이다. 백두대간의 원산 설령봉에서 일어나 만탑봉(2,205m), 괘상봉(2,136m), 궤상봉(2,541m), 관모봉(2,541m), 도정산(2,201m)을 지나 함경북도 내륙을 서북향으로 관통하는 산줄기이다. 도정산 이후 산세가 죽어들어 이후 고성산(1,756m), 차유령, 백사봉(1,138m), 송진산(1,164m)으로 이어져 두만강 하구 서수라곶에서 끝을 맺는다.
낙남정간(洛南正脈)
북쪽으로 줄곧 낙동강을 받드는 낙남정맥은 남부해안지방의 분계선으로 생활문화와 식생, 특이한 기후구를 형성시키는 중요한 산줄기이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하여 남하하다 옥산(614m)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곡산(543m), 여항산(744m), 무학산(763m), 구룡산(434m), 대암산(655m)을 거쳐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분산(盆山)에서 끝난다.
청북정맥(淸北正脈)
평안북도 내륙을 관통하며 압록강의 남쪽 울타리를 이룬다. 웅어수산에서 시작하여 낭림산을 지나 서쪽으로 흐른다. 갑현령(1,001m), 적유령(964m), 삼봉산(1,585m), 단풍덕산(1,154m)를 지나 온정령(574m)에서 산세가 수그러들어 신의주 남쪽 압록강 하구의 미곶산에서 끝난다.
청남정맥(淸南正脈)
웅어수산에서 시작하여 낭림산이 첫산이며 청천강의 남쪽 유역과 대동강의 북쪽 유역을 경계하는 분수령이다. 청남정맥의 으뜸산은 묘향산(1,365m)이며 이후 산줄기는 용문산(1,180m), 서래봉(451m), 강룡산(446m), 만덕산(243m), 광동산(396m)을 지나 용강의 남포에서 대동강 하구 광량진으로 빠진다.
해서정맥(海西正脈)
우리나라 북부와 중부지방의 문화권역을 경계하고 있는 분수령이다. 백두대간 두류산에서 시작하여 서남쪽 개연산에 이르러 다시 북상하다 언진산(1,120m)에서부터 남하하기 시작하여 멸악산(816m) 지나 서해의 장산곶에서 끝난다.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황해도의 오른쪽 울타리를 이루며 북쪽으로는 임진강, 남쪽으로 예성강의 분수령이다. 해서정맥의 화개산에서 시작하여 학봉산(664m), 수룡산(717m), 천마산(762m), 송악산(488m)을 지나 정맥의 끝은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점 즉 개성의 남산인 진봉산(310m)이다.
한북정맥(漢北正脈)
북쪽으로 임진강 남쪽으로 한강의 분수령이 된다. 백봉에서 시작한 한북정맥은 백암산(1,110m), 법수령을 지나 휴전선 가까운 오성산(1,062m), 철책 넘어 대성산으로 이어진다. 포천 백운산(904m) 운악산(936m), 서울 도봉·북한산(837m), 고봉산(208m)을 지나 임진강과 한강의합류 지점인 교하의 장명산(102m)에서 끝난다.
낙동정맥(洛東正脈)
낙동강의 동쪽을 따르는 산줄기로 동해안 지방의 담장이다. 매봉산에서 시작하여 울진 백병산(1,259m) 통고산(1,067m), 울진 백암산(1,004m), 청송 주왕산(720m), 경주 단석산(829m), 울산 가지산(1,240m) 신불산(1,209m), 부산 금정산(802m)을 지나 백양산(642m)을 넘어 다대포의 몰운대에서 끝난다.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한강과 금강을 나누는 분수령이다. 속리산 천황봉(1,508m)에서 시작하여 말티고개, 선도산(547m), 상당산성, 좌구산(657m), 보현산(481m)을 지나 칠현산(516m)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과 갈라지면서 한남금북정맥은 끝이 난다.
한남정맥(漢南正脈)
한강 유역과 경기 서해안 지역을 분계한다.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 북쪽 2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칠장산(492m)에서 시작된다. 백운산, 보개산, 수원 광교산(582m), 안양 수리산(395m)을 넘으며 김포평야의 낮은 등성이와 들판을 누비다 계양산(395m), 가현산(215m) 지나 강화도 앞 문수산성에서 끝맺는다.
금북정맥(錦北正脈)
금강의 북쪽 울타리이다. 한남정맥과 헤어진후 칠현산(516m), 안성 서운산, 천안 흑성산(519m), 아산 광덕산(699m), 청양 일월산(560m), 예산 수덕산(495m)을 지난다. 산줄기는 예산 가야산(678m)에서 멈칫거리다 성왕산(252m), 백화산(284m)를 거쳐 태안반도로 들어 반도의 끝 안흥진에서 끝을 맺는다.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다. 장수 영취산(1,076m)에서 시작하여 장안산(1,237m) 수분현(530m) 팔공산(1,151m), 임실 성수산(1,059m), 진안 마이산(667m), 진안 부귀산(806m)에서 끝난다.
금남정맥(錦南正脈)
전주의 동쪽 마이산(667m)에서 북으로 치달아 대둔산(878m), 계룡산(828m)을 거친후 서쪽으로 망월산을 지나 부소산 조룡대에서 끝난다. 금강의 온전한 남쪽 울타리를 이루지 못하는 이 산줄기는 운장산 지나 왕사봉에서 남당산-까치봉-천호봉-미력산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호남정맥(湖南正脈)
낙남정맥과 함께 우리나라 남부해안문화권을 구획하는 의미있는 경계선이다. 정맥의 동쪽은 섬진강, 서쪽은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이다. 금남호남정맥에서 갈래친후 강진 만덕산(762m)을 처음 만나고 이후 내장산(763m), 추월산(729m), 무등산(1,187m), 제암산(779m), 조계산(884m) 등 남도의 큰산을 지나 광양 백운산(1,218m)이 끝이다. 백운산에서 아쉬운 산자락의 여운은 백운산 남쪽을 달려 섬진강을 휘감으며 망덕산(197m)에서 비로소 끝난다.
산경표 읽기
백두대간
백두산(白頭山) 연지봉(檎脂峰) 허항령(虛項嶺) 보다회산(寶多會山) 사이봉(沙伊峰) 완항령(緩項嶺) 어은령(漁隱嶺) 원산(圓山:장백정간의 분기점) 마등령(馬騰嶺) 괘산령(掛山嶺) 황토령(黃土嶺) 천수령(天秀嶺) 조가령(趙哥嶺) 후치령(厚致嶺) 향령(香嶺) 태백산(太白山) 부전령(赴戰嶺) 대백역산(大白亦山) 황초령(黃草嶺) 사향산(麝香山) 설한령(雪寒嶺) 낭림산(浪林山:청북정맥, 청남정맥의 분기점) 상검산(上劍山) 마유산(馬踰山) 횡천령(橫天嶺) 두무산(頭蕪山) 애전산(艾田山) 철옹산(鐵瓮山) 오강산(吳江山) 운령(雲嶺) 무라발산(无羅鉢山) 거차산(巨次山) 토령(土嶺) 장좌령(莊佐嶺) 대아치(大峨峙) 죽전령(竹田嶺) 기린령(麒麟嶺) 재령산(載靈山) 화여산(花餘山) 두류산(頭流山:'무명 지맥'의 분기점. 무명지맥은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으로 연결된다.) 노동현(蘆洞峴) 반룡산(盤龍山) 마은산(馬恩山) 노인치(老人峙) 박달령(朴達嶺) 백학산(白鶴山) 설운령(洩雲嶺) 설탄령(雪呑嶺) 분수령(分水嶺:한북정맥의 분기점) 청하령(靑霞嶺) 추포령(楸浦嶺) 풍류산(風流山) 철령(鐵嶺) 판기령(板機嶺) 기죽령(騎竹嶺) 저유령(猪踰嶺) 추지령(楸池嶺) 판막령(板幕嶺) 쇄령(朝嶺) 온정령(溫井嶺) 금강산(金剛山) 회전령(檜田嶺) 진부령(珍富嶺) 마기라산(磨耆羅山) 흘리령(屹里嶺) 미시파령(彌時坡嶺) 설악(雪岳) 오색령(五色嶺) 연수령(連水嶺) 조침령(曹枕嶺) 구룡령(九龍嶺) 오대산(五臺山) 대관령(大關嶺) 삽당령(揷當嶺) 백복령(百福嶺) 두타산(頭陀山) 청옥산(靑玉山) 죽현(竹峴) 건의령(建儀嶺) 대박산(大朴山) 태백산(太白山:낙동정맥의 분기점) 수다산(水多山) 백변산(白屛山) 마아산(馬兒山) 곶적산(串赤山) 소백산(小白山) 죽령(竹嶺) 도솔산(兜率山) 작성산(鵲城山) 대미산(黛眉山) 계립산(鷄立山) 조령(鳥嶺) 이화현(伊火峴) 희양산(曦陽山) 주현(周峴) 대야산(大耶山) 불일산(佛日山) 화산(華山) 속리산(俗離山:한남금북정맥의 분기점) 구봉산(九峰山) 봉황산(鳳凰山) 웅현(熊峴) 웅이산(熊耳山) 고산(高山) 흑운산(黑雲山) 추풍령(秋風嶺) 계방산(桂榜山) 황악산(黃岳山) 삼성산(三聖山) 우두산(牛頭山) 삼도봉(三道峰) 대덕산(大德山) 덕유산(德裕山) 백암봉(白巖峰) 봉황산(鳳凰山) 육십치(六十峙) 장안치(長安峙:금남호남정맥의 분기점) 본월치(本月峙) 백운산(白雲山) 기치(箕峙) 유치(柳峙) 여원치(女院峙) 지리산(智異山: 낙남정맥의 분기점)
장백정간
(백두대간의 원산에서 이어짐) 장백산(長白山) 마유령(馬踰嶺) 거문령(巨門嶺) 계탕령(契湯嶺) 구탐령(俱探嶺) 차유령(車踰嶺) 이현(梨峴) 무산령(茂山嶺) 가응석령(加應石嶺) 엄명산(嚴明山) 녹야현(鹿野峴) 갈파령(葛坡嶺) 송진산(松眞山) 백악산(白岳山) 조산(造山) 서수라곶산(西水羅串山)
낙남정맥
(백두대간의 지리산에서 이어짐) 취령(鷲嶺) 황치(黃峙) 옥산(玉山) 소곡산(素谷山) 옥녀산(玉女山) 망진산(望晉山) 팔음산(八音山) 천금산(千金山) 무량산(無量山) 여항산(餘航山) 광려산(匡廬山) 두척산(斗尺山) 청룡선(靑龍山) 구룡산(九龍山) 전단산(?檀山) 불모산(佛母山) 구지산(龜旨山) 분산(盆山)
청북정맥
(백두대간의 낭림산에서 이어짐) 태백산(太白山) 갑현(甲峴) 도양령(道陽嶺) 적유령(狄踰嶺) 백산(白山) 구현(狗峴) 이파령(梨坡嶺) 매화령(梅花嶺) 극성령(棘城嶺) 우현(牛峴) 차령(車嶺) 아호말령(?號末嶺) 월은령(月隱嶺) 창성사령(昌城街嶺) 남리견자령(南里見子嶺) 대소구계령(大小九階嶺) 송동령(宋洞嶺) 완항령(緩項嶺) 대동사령(大東沙嶺) 소동사령(小東沙嶺) 대방장령(大防墻嶺) 소방장령(小防墻嶺) 세반산(洗畔山) 세정령(洗井嶺) 온정령(溫井嶺) 개막산(蓋幕山) 대성령(大城嶺) 소성령(小城嶺) 천마산(天摩山) 청룡산(靑龍山) 노동현(蘆洞峴) 장현(長峴) 이현(梨峴) 애령(艾嶺) 북송산(北松山) 보광산(普光山) 화산(華山) 동고산(東顧山) 백운산(白雲山) 망일산(望日山) 장화산(長化山) 서림산(西林山) 용골산(龍骨山) 법흥산(法興山) 미라산(彌羅山) 미곶산(彌串山)
청남정맥
(백두대간의 낭림산에서 이어짐) 지막산(只幕山) 광성령(廣城嶺) 생천산(?川山) 동무산(同茂山) 묘향산(竗香山) 검산(檢山) 알일산(謁日山) 장안산(長安山) 묘결산(卯結山) 백운산(白雲山) 고사산(姑射山) 묵방산(墨方山) 도회치(都會峙) 서산(西山) 마두산(馬頭山) 오도산(梧道山) 함박산(含朴山) 도운산(到雲山) 황룡산(黃龍山) 자모산성(慈母山城) 법홍산(法弘山) 호전산(虎田山) 어포현(於抱峴) 도정산(都廷山) 영천산(靈川山) 미두산(米頭山) 진망산(鎭望山) 독자산(獨子山) 두등산(豆登山) 국령산(國靈山) 망해산(望海山) 검암산(儉巖山) 호두산(虎頭山) 아선산(牙善山)굴영산(窟靈山) 봉곡산(鳳哭山) 오석산(烏石山) 화정산(花精山) 석골산(石骨山) 증복산(甑覆山) 자정산(慈正山) 증악산(甑岳山) 광량진(廣梁鎭)
해서정맥
(위 무명지맥의 개연산에서 이어짐) 덕업산(德業山) 대롱판(大幇板) 증격산(甑擊山) 만령(蔓嶺) 명월산(明月山) 천자산(天子山) 양파산(梁坡山) 조산(造山) 발은치(勃隱峙) 오봉산(五峰山) 갈현(葛峴) 황룡산(黃龍山) 차유령(車踰嶺) 멸악산(滅惡山) 성불산(成佛山) 취라산(吹螺山) 창금산(唱金山) 불족산(佛足山) 북숭산(北嵩山) 문산(文山) 천봉산(天奉山) 달마산(達摩山) 학산(鶴山) 원통산(圓通山) 극락산(極樂山) 불타산(佛陀山) 미라산(彌羅山) 장산곶(長山串) 해옹지험(穰甕之險)
임진북예성남정맥
(위 무명지맥의 개연산에서 이어짐) 기달산(箕達山) 천개산(天盖山) 화개산(華盖山) 학봉산(鶴峰山) 수룡산(首龍山) 백치(白峙) 우이산(牛耳山) 성거산(聖居山) 천마산(天摩山) 부소갑(扶蘇岬) 진봉산(進鳳山) 백룡산(白龍山) 풍덕치(豊德治)
한북정맥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이어짐) 천산(泉山) 쌍령(雙嶺) 전천산(箭川山) 수우산(水于山) 여파산(餘破山) 오갑산(五甲山) 충현산(忠峴山) 부정산(佛頂山) 대성산(大成山) 백운산(白雲山) 망국산(望國山) 운악산(雲岳山) 주엽산(注葉山) 축석현(祝石峴) 불곡산(佛谷山) 홍복산(弘福山) 도봉(道峯) 삼각산(三角山) 노고산(老枯山) 여산(礪山) 견달산(見達山) 고봉산(高峰山) 장명산(長命山)
낙동정맥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이어짐) 유치(楡峙) 마읍산(麻邑山) 말흔산(末欣山) 백병산(白屛山) 고초산(高草山) 검마산(劒磨山) 백령산(白嶺山) 덕현(德峴) 서읍령(西揖嶺) 용두산(龍頭山) 임물현(林勿峴) 죽현(竹峴) 주방산(周方山) 어화산(於火山) 보현산(普賢山) 응봉(鷹峯) <육현(六峴)> 성현(成峴) 무학산(無鶴山) 주사산(朱砂山) 사룡산(四龍山) 지화산(只火山) 단석산(斷石山) 운문산(雲門山) 가지산(迦智山) 천화현(穿火峴) 취서산(鷲栖山) 원적산(圓寂山) 금정산(金井山) 화지산(花池山) 엄광산(嚴光山) 몰운대(沒雲臺)
한남금북정맥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이어짐) 회유치(回踰峙) 구치(龜峙) 연치(燕峙) 피반령(皮盤嶺) 선도산(仙到山) 거죽령(巨竹嶺) 상령산(上嶺山) 상당산(上黨山) 분치(粉峙) 좌구산(坐龜山) 보광산(普光山) 봉학산(鳳鶴山) 증산(甑山) 마곡산(麻谷山) 보현산(普賢山) 소속리산(小俗離山) 망이산(望夷山) 주걸산(周傑山) 칠현산(七賢山)
한남정맥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이어짐) 백운산(白雲山) 구봉산(九峯山) 대소곡돈현(大小曲頓峴) 성륜산(聖倫山) 수유산(水踰山) 부아산(負兒山) 보개산(寶盖山) 석성산(石城山) 객망현(客望峴) 광교산(光敎山) 사근현(沙斤峴) 오봉산(五峰山) 수리산(修理山) 오자산(五子山) 소래산(蘇來山) 성현(星峴) 주안산(朱安山) 원적산(元積山) 경명산(鏡明山) 북성산(北城山) 가현산(歌絃山) 약산(藥山) 문수산(文殊山)
금북정맥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이어짐) 청룡산(靑龍山) 성거산(聖居山) 망일치(望日峙) 월조산(月照山) 의랑치(義郞峙) 차령(車嶺) 쌍령(雙嶺) 광덕산(廣德山) 각흘치(角屹峙) 송악(松岳) 납운치(納雲峙) 차유령(車踰嶺) 사자산(獅子山) 우산(牛山) 구봉산(九峯山) 백월산(白月山) 성태산(星台山) 오서산(烏栖山) 보개산(寶盖山) 월산(月山) 수덕산(修德山) 가야산(伽倻山) 성국산(聖國山) 팔봉산(八峰山) 백화산(白華山) 지령산(知靈山) 안흥진(安興鎭)
금남호남정맥
(백두대간의 장안치에서 이어짐) 노치(蘆峙) 수분현(水分峴) 성적산(聖跡山) 팔공산(八公山) 성수산(聖壽山) 중대산(中臺山) 마이산(馬耳山)
금남정맥
(금남호남정맥의 마이산에서 이어짐) 주줄산(珠?山) 왕사봉(王師峰) 병산(屛山) 탄현(炭峴) 이치(梨峙) 대둔산(大芚山) 도솔산(兜率山) 황령(黃嶺) 개태산(開泰山) 계룡산(鷄龍山) 판치(板峙) 망월산(望月山) 부소산(扶蘇山) 조룡산(釣龍山)
호남정맥
(금남호남정맥의 마이산에서 이어짐) 웅치(熊峙) 사자산(獅子山) 백운산(白雲山) 정각산(正覺山) 유치(鍮峙) 색장치(塞墻峙) 운남치(雲南峙) 묵방산(墨方山) 운주산(雲住山) 굴치(屈峙) 칠보산(七寶山) 둔월치(屯月峙) 갈치(葛峙) 내장산(內藏山) 백암산(白巖山) 곡도치(曲道峙) 멸치(滅峙) 추월치(秋月峙) 용천치(龍泉峙) 금성산성(金城山城) 과실산(果實山) 옥천산(玉泉山) 만덕산(萬德山) 무등산(無等山) 경산(景山) 구봉산(九峯山) 천운산(天雲山) 중조산(中條山) 여점산(呂岾山) 화악산(華岳山) 용두산(龍頭山) 억불산(億佛山) 사자산(獅子山) 가야산(伽倻山) 주월산(舟月山) 금화산(金華山) 노주산(路周山) 금전산(金錢山) 분계치(分界峙) 조계산(曹溪山) 동리산(洞裏山) 송현(松峴) 계족산(鷄足山) 도솔산(兜率山) 백운산(白雲山)
『산경표』는 언제 누가 만들었나?
우리 것에 대한 눈뜸과 자연환경 보전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백두대간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요즘 논의하고 있는 백두대간은 『산경표』(山經表)라는 작은 책에 실린 이 땅의 산줄기 분류체계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줄기 이름이다.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이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로 흐르다가 어디서 끝나는지를 족보 형식으로 도표화(圖表化)한 책이다.
백두대간과 『산경표』가 점차 널리 알려지고 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면서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서로 시각과 견해를 달리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산경표』를 언제 누가 만든 것인가 하는 논제 또한 그 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관련한 견해를 몇 가지 살펴보고, 『산경표』 및 관련 문헌을 통해 실증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산경표』(山經表)는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기봉방역지』(箕封方域誌), 『산리고』(山里攷, 이상 서울대학교 규장각), 『여지편람』(輿地便覽)(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해동산경』(海東山經, 국립중앙도서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된 책의 일부로서 {정리표}(程里表, 道里表)와 함께 전해온다. 모두가 한문으로 된 필사본이며, 필자와 연대를 밝히지 않았고 서문이나 발문도 싣지 않고 있다.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가 최성우(崔誠愚) 소장본을 대본(臺本)으로 1913년 2월 단행본으로 간행한 『산경표』(신연활자본)에는 "편찬자는 알 수 없다." 撰者 未考 고 하면서도 서문(해제)에서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여지고](輿地考)를 거론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음을 지적하게 된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산경(山經)만이 그 줄기[幹]와 갈래[派]의 내력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높이 솟아 어느 산을 이루고, 비껴 달리다가 어느 고개에 이르며, 굽이돌아 어느 고을을 둘러싸는지를 상세히 싣지 않은 것이 없기에, 이야말로 산의 조종을 알려 주는 표라 할 만하다. 산경을 바탕[綱]으로 삼고 옆에 이수(里數)를 조목[目]으로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범위와 경계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니, 원전으로 삼은 산경에 금상첨화일 뿐만 아니라 실로 지리가의 나침반[指南]이 될 만하다 하겠다."( 考東方地志論山者類多 摘拔其尤散亂無統 惟輿地考申景濬所撰 山經直 幹波來歷 高起爲某嶽橫馳爲某嶺 回抱爲某治無不詳載 寔爲導山之祖是表也 以山經爲綱而旁附里數目 而張之全區界境曉然爲指掌 非但爲原經之錦花 實爲地理家之一指南云爾)
위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서문의 [여지고]는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가리킨다. 조선광문회는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신경준이 저술했다는 것과, 누군가 [여지고]를 보고 『산경표』를 만들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광문회가 그렇게 확신했다는 사실이 '『산경표』의 원전은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임'을 직접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선광문회가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지 이를 논증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가 당시로서는 달리 논증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는 '일반적이고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1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현시점에서는 이를 별도로 논증해야 하므로 이 점은 뒤에서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겠다.
한편 위의 서문 중 '[여지고]의 산경'이라는 표현은 용어 사용 면에서 다소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에는 [산천](山川)이라는 내제(內題)가 있고 신경준의 또 다른 저작이면서 같은 내용인 『산수고』에는 [산경](山經)이라는 내제(편목, 하위목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는, '[여지고]의 [산천]'은 책의 내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적 성격으로, 서문에서 말하는 '[여지고]의 산경'이란 '[여지고]에서 기술한 산경', 곧 '산의 줄기 幹 와 갈래 派 의 내력'을 기술한 '[산천]의 내용'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각각 이해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2. 박용수는 1769년 신경준이 영조의 명을 받아 『여지편람』을 감수 편찬했다는 점과 건 곤 2책으로 된 『여지편람』(필사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 이하 장서각본이라 함) 중 건책(乾冊)의 내제(內題)가 『산경표』라는 점을 들어, "『여지편람』의 건책이 바로 현재 전하는 『산경표』의 원전이며, 『산경표』의 저자는 신경준이며, 편찬시기는 1769년"이라고 단정하였다.(『산경표』, 푸른산, 1990)
3. 일찍이 『산경표』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이우형은 『산경표』의 한북정맥 추모현(追慕峴)에 '영종 45년'(1769)이라는 연대를 부기(附記)하고 있는 점, 여암(旅庵) 신경준이 1781년에 타계한 점, 장서각본 『여지편람』의 곤책(坤冊)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에는 정조 20년(1796)에 완공된 '화성'(華城. 수원)이 실려 있는 점 등을 적시(摘示)하고, "『산경표』의 출현 시기는 1800년 전후로, 찬표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였다.([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 월간 『산』, 1993. 6월호)
4. 양보경은 "일본 정가당 문고(靜嘉堂文庫)에 전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여지편람』은 전혀 다른 내용의 6책으로 된 조선 지도책"임을 밝히면서, "내용은 다르나 이름이 같은 책이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영조가 『동국문헌비고』의 편찬 과정을 설명하면서 '『여지편람』의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와 비슷하다'고 언급하였으나 장서각본 『여지편람』은 (『산경표』와) 『도리표』(道里表·『정리표』)로서 『문헌통고』와는 체제가 다른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장서각본 『여지편람』을 영조가 신경준에게 감수를 맡겼던 책으로 추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좀더 신중히 검토할 것"을 주문하였고,([조선시대의 자연인식 체계], 『한국사 시민강좌』 제14집, 일조각, 1994) "『산경표』에는 19세기초에 변화된 지명이 기재되어 있고 『문헌비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저자를 신경준으로 단정하기 어려우나, 『산경표』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였다.([여암 신경준의 지리사상], 『월간국토』 1999년 5월호)
5. 노상복은 "『여지편람』은 저자도 필사년대도 없으며 편찬과정이 소개된 서발문(序跋文) 등은 더구나 없다. 이 책의 곤부인 『정리표』의 내용이나 그 체제가 고종 때 오횡묵(吳宖默)이 편찬한 『여재촬요』(輿載撮要, 1894)의 『팔도도리표』(八道途里表)의 요약이라는 증빙만으로도 1895년 이후에 편집된 것임을 알 수 있고,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는 그 건부 『산경표』를 대본으로 발간한 것"이라고 하였다.(『장서각도서한국본해제집』 지리류(1), 1993 ; 『장서각도서해제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이상으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서문과, 『산경표』의 편찬자와 편찬시기 및 원전에 관한 대표적인 견해들을 살펴보았다. 조선광문회·이우형·양보경의 견해가 비교적 서로 근접해 있는 데 비해 박용수는 시기를 다소 올려 잡았으며 노상복은 너무 늦추어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문헌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구명(究明)하는 일은 뚜렷한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고 논리적 타당성을 가질 때 비로소 과학적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확립된 학문적 성과로부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을 잣대로 삼아 이와 관련된 또 다른 특정 사안을 검토함으로써 새로운 사실을 추정해 나갈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산경표』의 편자와 연대 및 원전에 대한 논의 또한 『산경표』의 내용 중에서 역사·문화·정치 등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사항을 찾아내고, 그것을 이미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기존의 역사·문화적 사실과 비교 검토함으로써 어느 정도 새로운 사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산경표』의 편자 등을 논의함에 있어서도 몇 가지 미리 전제(前提)해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첫째로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46년(1770)에 간행되었고 그 가운데 [여지고]는 신경준이 저술했다는 점, 둘째로 현재 전하고 있는 『산경표』가 최초의 『산경표』로부터 전사(轉寫)를 거듭하는 동안 사본 작성자가 임의로 그 내용을 변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제 『산경표』의 내용 중 중요한 사항 몇 가지와 관련 문헌들을 좀더 세밀히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첫째,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99쪽 혈 頁 호남정맥 지래산(知來山) 갈래의 주석에 『문헌비고』를 거론하고 있다.
"『문헌비고』 본문을 살펴보면 가야산과 금전산 사이에 '초암산 한 갈래가 동남쪽으로 지래산 망주산 간둔산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초암산이 혹 이 주월산 이하 3산의 별명인지, 혹 이 3산 외에 또 다른 산이 하나 있음에도 본문에서 빠뜨린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 지래산 이하의 모든 산이름을 이곳에 적는다."(按文獻備考本文 伽倻金錢之間 有'草巖山一麓東南至知來望主看屯山'則 草巖惑是舟越以下三山之別名 惑是三山之外自有一山而 本文漏之歟今幷未可知 故姑錄知來以下諸山于此)
이처럼 『산경표』에 『문헌비고』가 직접 거론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 내용을 확인해 보는 것만으로도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위의 『문헌비고』는 다름 아닌 『동국문헌비고』이다. 우리나라에서 『문헌비고』라는 이름으로 간행된 최초의 서적은 『동국문헌비고』이고, '초암산 한 갈래가 동남쪽으로 지래산 망주산 간둔산에 이른다'는 부분은 『동국문헌비고』 중 [여지고]의 [산천 총설1] 본문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주석은 『산경표』를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보고 만들었다는 것을 직접 밝히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47년(1770)에 편찬되었으므로 『산경표』가 출현할 수 있는 시기는 최소한 1770년 이후이다. 그리고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신경준이 저술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신경준이 『문헌비고』([여지고])의 오류를 지적하는 글을 자신의 또 다른 책에 썼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신경준은 [여지고]를 저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직접 『산경표』를 만든 것으로는 볼 수 없다.
둘째,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62쪽 한북정맥 추모현(追慕峴)에 '본명은 사현이다. 영종 45년에 개명하였다.'(本名沙峴 英宗四十五年改名)고 부기하고 있다.
'영종'(英宗)은 '영조'(英祖 : 1694∼1776, 재위 : 1724∼1776)의 원 묘호(廟號)이며, 영종 45년은 서기 1769년이다. 영조는 재위 52년(1776. 3. 5·병자)에 83세를 일기로 타계하였고, 같은 해 3월 10일(신사)에 묘호를 '영종'이라 하였으며, 고종 27년(1890. 1. 5)에 '영조'(英祖)로 추존(追尊) 개정(改定)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조 21대 임금을 공식적으로 '영종' 또는 '영조'로 부르거나 기록할 수 있었던 시기는 각각 1776년과 1890년 이후이다. 따라서 『산경표』의 최초 출현 시기는 자연스럽게 1776년 이후로 미루어진다.
셋째,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는 1776∼1800년에 개칭된 행정구역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정조 즉위년(1776. 5. 22·임진)에 평안도 이산(理山)을 초산(楚山)으로, 충청도의 이산(尼山)을 이성(尼城)으로 각각 개칭했고, 순조 즉위년(1800. 8. 20·경오)에는 함경도 이성(利城)을 이원(利原)으로, 앞의 충청도 이성(尼城)을 다시 노성(魯城)으로 각각 개칭한 바 있다.
그런데 『산경표』는 초산(楚山 38쪽 자현 磁峴)과 이성(尼城 91쪽 노산 魯山)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고, 개칭 이전의 이성(利城 8쪽 궐파산 蕨坡山)과 개칭 후의 이원(利原 9쪽 좌역령 佐驛嶺)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으며, 같은 1800년에 개칭된 노성(魯城)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광문회가 최성우 소장본을 대본으로 삼아 『산경표』를 활자화하면서 전혀 오탈자 없이 옮겼으리라고 가정한다면, 최성우 소장본 『산경표』는 지명이 개칭된 1800년 이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점과 개칭 이전에 출간된 문헌을 저본(底本)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점을 동시에 알 수 있다. 또 신경준은 1781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1800년에 개칭된 이원(利原)이라는 지명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산경표』의 편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넷째, 『산경표』는 [여지고]의 [산천 총설1]과 전면적으로 일치한다. 『동국문헌비고』는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없으나, 대신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를 통하여 『동국문헌비고』 중 [여지고]의 본모습을 상고해 볼 수 있다. 증보된 부분과 시대변천에 따라 추가된 부분에는 ' (補), (續)'과 같은 표지를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지고]는 3차에 걸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1770), 『증정문헌비고』(1831, 미간행), 『증보문헌비고』(1908)에 공통적으로 [상위고]에 이어 두 번째(제2고)로 실려 있는 지리 분야에 관한 저술이다. 원래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는 17권(권6∼22)이었는데 『증보문헌비고』에서는 27권(권13∼39)으로 늘어났다. [역대국계], [군현연혁], [산천], [도리], [관방], [간도강계], [궁실] 등 7개의 하위목차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궁실]은 『증정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추가되었던 [궁실고]이고, [간도강계]는 『증보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추가되었다.
[산천]은 모두 5권(권7∼11)이며, 각각 [산천1](총설1 산 山), [산천2](총설2 천 川), [산천3](한성부, 경기도, 충청도), [산천4](전라도, 경상도), [산천5](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산천 총설1]의 내용은 산경(山經)이며, [산천 총설2]의 내용은 수경(水經)이다. 실제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와 『증보문헌비고』 중 [여지고]의 [산천 총설1]을 대조해 보면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부분적인 오탈(誤脫)로 볼 수 있는 사항을 제외하고는 전면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산경표』는 [여지고]의 [산천 총설1]을 그대로 족보식으로 재편집하여 산줄기 幹 (대간 정간 정맥)와 갈래 派 를 구성하고, 각론에 해당하는 [산천3]∼[산천5]의 각 군현 조(條)에서 군현의 치소(治所)로부터 산에 이르는(간혹 산으로부터 치소에 이르는) 방향과 거리를 확인하여 산이름 옆에 부기함으로써 완성한 것이다. 일부 지명(산의 소재지)은 [관방 성곽 해방]을 인용하기도 했고, 산이름이나 부기할 행정구역 명칭이 누락된 부분도 일부 발견된다.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에 수록된 산·고개·일반지명은 모두 1,580개 항목이다. 그런데 『산경표』에는 산줄기와 갈래의 연결표지가 없거나 연결이 잘못된 것, 그리고 갈래표지가 없거나 갈래표지와 실제 등재된 갈래(산)의 수가 다른 것들이 있고, 65쪽 낙동정맥의 경우 산줄기 가운데 부분의 3개 항목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런 사례들은 최초의 『산경표』로부터 전사(轉寫)를 거듭하는 동안 표지(標識)와 지명(산이름)이 탈락되거나 위치가 달라진 것으로서, [산천 총설1]을 통하여 원래의 위치와 탈락된 지명 12개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산경표』를 만들 당시에 누락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지명 18개, [산천 총설1] 원문의 오류(누락)로 인한 것 3개 등을 합해 모두 33개를 『산경표』에 재구(再構) 보완(補完)할 수 있다. 그 밖에 『산경표』에는 원래 산이름 옆에 부기했던 행정구역 명칭이 전사 과정에서 별도의 항목으로 변전(變轉)된 것으로 확인되는 것 2개가 있어, 이를 가감하면 『산경표』의 지명(항목)은 모두 1,611개로 집계된다. 한편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에 같은 지명을 산(山)과 고개 嶺, 峴, 峙 2가지로 표기한 사례 10개, [총설1]과 군현 조(條)의 표기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사례 42개, 지명의 성질을 잘못 파악한 사례 30개, 산이름의 표기가 (모양이 비슷한) 다른 글자로 변전된 사례 45개 등을 서로 비교 고증할 수 있다.
[산천 총설1]에는 『산경표』와 달리 대간·정간·정맥 등의 산줄기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경표』의 산줄기는 근본적으로 [산천 총설1]의 문단(단락) 구성을 따라 설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산줄기 설정에 일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산경표』를 작성한 사람이 착오를 일으킨 것인지 '산경'에 대한 인식을 달리한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1,580∼1,611개에 달하는 산·고개·일반지명을 어떤 기준으로 항목화하고 어떻게 줄기 幹 와 갈래 派 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시각을 제외하면 전면적으로 동일한 그림이 된다.
다섯째, 『산경표』는 [산천 총설 1] 특유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고, 원문의 지명이 중복된 것을 인지한 흔적이 있고, 원문의 오류(누락)를 지적하거나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증보된 사항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산경표』 50쪽에는 해서정맥의 마지막 지명을 '해옹지험( 甕之險)'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해옹지험'이란 [여지고]의 [산천 총설 1]에서 황해도 장연(長淵)의 장산 앞바다에 있는 '해옹암( 甕巖)'이라는 바위섬을 거론하면서 이 지역의 지형지세가 험난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독특한 서술구조이지, 그 자체가 곧 지명은 아니다. [여지고]의 [관방(關防) 해방(海防)4] 황해도 장연(長淵) 조(條)에서 '해옹암'이라는 지명이 확인되며, 이를 "백여 길 장 丈] 되는 바위 두 개가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데 곧 장산(長山)의 석맥(石脈)이 물 속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해옹암'은 『대동여지도』에서도 확인된다.
[산천 총설1]의 태백산∼속리산 단락 중 화산(華山 : 문경)의 갈래에도 재악산(宰嶽山, 함창 : 원문의 착오)이 있고 속리산∼장안산 단락 중 황령(黃嶺, 함창) 다음에도 재악산(宰嶽山, 함창)이 있다. ⇒ 그런데 『산경표』는 27쪽 속리산의 갈래인 황령 다음의 재악산(뒤의 것)만을 항목으로 등재하고, 26쪽 화산의 갈래에는 이를 항목으로 등재하지 않고 "'화산으로부터 동쪽으로 재악산에 이른다'고도 하였다."(一云自華山東爲宰岳)는 주석을 붙이고 있다. 이것은 원문에 산이름이 중복된 것을 발견하고 그 중 하나만을 항목으로 등재하고 다른 하나에는 위와 같은 주석을 붙인 것임을 확인해 준다. 이 주석은 [산천 총설1]의 "화산 한 갈래가 동쪽으로 재악산에 이르고 남쪽에 함창현치가 있다."(華山一麓東至宰嶽山南有咸昌縣治)는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산천 총설1]의 내장산∼달마산 단락 중 가야산(伽倻山)·주월산(舟越山) 다음과, 금화산(金華山)·주로산(周路山)·금전산(金錢山) 앞에 초암산(草巖山)을 누락시킨 채로 그 하위단락에서 초암산으로부터 갈래치는 산이름들을 기술하였다. ⇒ 『산경표』는 98쪽 호남정맥(주월산과 금화산 사이)에 초암산을 등재하지 않고, 이 초암산으로부터 갈래치는 지래산 이하의 3산을 주로산 옆에서부터 내리 적은 후, 그 왼쪽에 "『문헌비고』 본문을 살펴보면 가야산과 금전산 사이에 '초암산 한 갈래가 …"라는 주석을 붙였다. '가야산과 금전산 사이'란 [산천 총설1] 원문에 가야산의 갈래·초암산의 갈래·금전산의 갈래 순으로 산의 갈래를 기술하고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산천 총설1]의 태백산∼속리산 단락 중 전록산(轉祿山)과 천등산(天登山) 사이에 박달산(朴達山)을 누락시킨 상태로 그 하위단락에서 박달산으로부터 갈래치는 산이름들을 기술하였다. ⇒ 『산경표』 25쪽 백두대간 전록산과 천등산 사이에 박달산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원문의 오류(누락)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산천 총설1]의 내장산∼달마산 단락 중 무등산(無等山)의 갈래로 나한산(羅漢山)이 증보되었다. ⇒ 『산경표』 95쪽 호남정맥 무등산의 갈래에 나한산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런 점을 살펴볼 때, 『산경표』는 [여지고]의 [산천]을 보고 만든 것이되 증보되지 않은 상태인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보고 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섯째, 장서각본 『여지편람』의 건책 『산경표』는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와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 내용과 체제 면에서 같은 책이다. 이 책에서도 『문헌비고』(50장 丈 앞면)라는 책이름, 영종(英宗) 45년(31장 뒷면)이라는 연대 표기, 1776년에 개칭된 초산(楚山, 19장 뒷면)과 이성(尼城, 46장 앞면)이라는 지명 등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다만 1800년에 개칭된 이원(利原)과 노성(魯城)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대본이 된 최성우 소장본보다 다소 앞선 시기에 발생한 사본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곤책 『정리표』까지 살펴보면 비록 시기적으로 앞선다 하더라도 1800년에 근접한 시기에 발생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곤책 『정리표』는 [거경정리표]와 [사방정리표]로 되어 있는데, [사방정리표]에는 정조 19년(1795)에 개칭된 시흥(始興, 2장 뒷면)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고, [거경정리표]에는 이를 종전의 금천(衿川, 11장 뒷면)으로 표기하는 한편, 정조 20년(1796)에 완공된 화성(華城 : 수원, 11장 뒷면)과 1800년에 개칭된 노성(魯城, 13장 앞면)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책과 곤책의 발생시기가 다를 수 있는데, 대개 건·곤 2책의 경우 먼저 건책이 만들어지고 연이어 곧 곤책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보면 별다른 잘못은 없을 것이다.
이상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장서각본 『여지편람』을 영조가 신경준에게 감수 편찬하게 했다는 『여지편람』으로는 볼 수 없다. 그리고 순조(1790∼1834) 재위연간(1800∼1834)과 그 이후에 신설되거나 변경된 행정구역 명칭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점과, '영종'을 '영조'로 추존 개정한 1890년 이후에는 '영조'라고 표기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여지편람』의 『산경표』가 1895년 이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 또한 없다고 판단된다.
한편 『증보문헌비고』 [권수](卷首)의 [영조조 어제 동국문헌비고 서](英祖朝御製東國文獻備考序)를 살펴보면, 영조가
"… 처음에 『강역지』로 인하여 『여지편람』을 편찬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범례를 들어보니 『문헌통고』에 가까우므로 그 이름을 『동국문헌비고』라 하도록 다시 명하였으니 소위 [여지]는 곧 그 가운데 한 가지일 따름이다. …"(… 初因彊域誌命纂輿地便覽 聞其凡例近於文獻通考 更命其名曰東國文獻備考 所謂輿地卽其一事也 …)라고 하였다.
그런데 장서각본 『여지편람』은 건 곤 2책으로 된 지리서이고 원나라의 마단림(馬簞臨)이 편찬한 『문헌통고』는 송나라 때의 법제 경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사(文物史)를 기록한 책(348권)으로서 내용과 체제가 전혀 다르며, 위 인용문의 내용으로 보아 『여지편람』이라는 책이 당시에 완성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또한 같은 『증보문헌비고』의 [예문고](藝文考) 여지류(輿地類) 조(條)에 신경준이 지은 책으로 『강계지』(疆界志)·『산수경』(山水經)·『도리고』(道里考) 등을 실으면서 『여지편람』은 싣지 않은 점, 『여암집』(旅庵集, 필사본, 8권 4책,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과 『여암전서』(旅庵全書, 경인문화사, 1976 : 신조선사, 1929, 석판본을 영인한 것) 등에도 실리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보면,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지편람』은 별도로 편찬(완성)된 책이라기보다는 [여지고] 또는 『동국문헌비고』의 초고(草稿)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상으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내용 중 그 원전과 편자 및 연대를 상호 관련지어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로서, 『산경표』가 『문헌비고』를 직접 거론하고 있고, 그 인용문이 [여지고]의 [산천 총설1] 본문과 일치한다는 점, 영종 45년(英宗四十五年)이라는 연대를 부기하고 있는 점, 1776∼1800년에 개칭된 행정구역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점 등을 적시(摘示)하였다.
그리고 『산경표』와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대조해 보면 『산경표』는 [여지고]의 [산천 총설1]과 전면적으로 일치한다는 점, 『산경표』가 [산천 총설 1] 특유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고, 원문의 지명이 중복된 것을 인지한 흔적이 있고, 원문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증보된 사항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을 예를 들어 설명함으로써, 『산경표』는 증보되지 않은 상태인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보고 작성한 것임을 논증하였다.
또한 장서각본 『여지편람』의 건책 『산경표』는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와 내용과 체제 면에서 같은 책으로서, 『문헌비고』, 영종(英宗) 45년, 초산(楚山)·이성(尼城) 등을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증보문헌비고』의 [영조조 어제 동국문헌비고 서]의 내용과, 같은 책의 [예문고]·『여암집』·『여암전서』 등에 실리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영조가 신경준에게 편찬하게 했다는 『여지편람』으로는 볼 수 없으며, 당시의 『여지편람』은 [여지고] 또는 『동국문헌비고』의 초고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산경표』는 영조 46년(1770)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중 신경준이 집필한 [여지고]의 [산천]을 보고, 순조 즉위년(1800) 경에 누군가 만든 것이며, 편자는 알 수 없지만 신경준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산악인 이우형씨 <대동여지도> 완성했다.
누락된 <동여도>의 지명 옮겨 넣은 새 <대동여지도> 완간
한국지도사에서 불멸의 업적으로 꼽히고 있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 진가가 사장되다시피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새로이 생명력을 불어넣는 대작업을 산악인으로서 20여년간 지도 제작에 전념해 온 현대판 김정호 이우형씨(56.李祐炯.광우당 대표)가 완성했다. 그는 고산자(古山子)가 당시 목각(木刻)의 어려움 때문에 <대동여지도>에는 일부 누락됐던 <동여도(東輿圖)>상의 옛지명을 대동여지도에 몽땅 옮겨 3분의 2 축소판을 발행하는 한편 「대동여지도의 독도」라는 책자를 함께 발행, 대동여지도의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이우형씨에 의해 실로 100여년만에 고산자의 그 완전한 뜻이 이뤄진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이르면 잠자리에서도 생각했지요. 왜, 왜 하고 말이죠. 그러다가 이제 그만 자야지 하고 돌아눕다 보면 환한 새벽이곤 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숨겨진 뜻을 풀어 나가기 위해 보냈던 지난 5년간에 걸친 각고의 나날을 이우형씨는 그렇게 돌이킨다.
고산자 김정호는 필사본인 <동여도>를 기본으로 목각본인 <대동여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목각상의 어려움 때문에 동여도상에는 총19,000여 개였던 지명 가운데 7,400여 개를 뺀, 11,700여 개만 대동여지도에 판각했다. 현대판 김정호로 불리는 이우형씨는 이 누락된 지명을 일일이 확인해 추가인쇄한 대동여지도 3분의 2 축소판 300부와 함께 「대동여지도의 독도」라는 책자를 발행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대동여지도>에 문외한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우형씨 그에게 외려 '왜'하는 의문사를 던지게 마련이다. '무엇 때문에, 항공촬영으로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각종 지도가 얼마든지 있는 이 현대에 무엇하러 그 냄새나는 묵은 옛지도를 가지고 무려 5년이나 씨름을 했다는 말인가' 하고
당연한 질문이라면서 이우형씨는 그 자신도 연구를 해 나가는 도중 <대동여지도>가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대는 다르지만 같은 지도 제작자로서 고산자에게 갖게 된 애정이 대동여지도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제가 <대동여지도>를 처음 대한 것은 70년대 말 경이었는데, 그 목판본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는 사이 이것이 보통 정성과 뜻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에게 헬리콥터를 한 대 주고 해보라고 해도 10년 세월은 족히 걸리겠다 싶었어요. 이와 함께, 도대체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방대한 작업에 손을 댔을까 하고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선 85년에 단순작업으로서 <대동여지도> 영인본을 제작, 발행한 후 곧이어 연구에 들어갔다. 의문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과연 그는 세간에서 알고 있는 대로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오르내리며 직접 전국을 누비고 다녔는가, 산줄기 표시는 어떤 기준으로 굵기를 달리했는가, 평야지대에까지 선명한 산줄기를 그려 넣은 이유는 무엇인가, 저마다 틀리게 그린 산봉 모양에는 어떤 기준을 두었는가, 한자로 된 지명 표기는 우리말로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각 지점간 도로 표시는 점을 찍은 간격이 지역에 따라 다른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붓으로 대강 찍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까 등등
고산자가 제작한 지도는 <대동여지도>외에 <청구도(靑邱圖)>와 <동여도>가 있다. 이 세 가지 지도는 다음과 같은 연관관계를 갖는 것으로 학계에는 밝혀져 있다. 즉 김정호는 그의 나이 30세 때 당시까지 있었던 각 지역별 지도에서 미흡한 점을 보완하여 우선 지리서적 사항도 세세히 기록한 원도로서 <청구도>를 제작했다. 그 후 20년간 각종 자료를 수집해 모은 자료서인 『여도비지(輿圖備志)』등의 자료와 <청구도>를 바탕으로 필사본(筆寫本)인 <동여도>를 제작했다. 이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세밀한 고지도인 이 <동여도>를 바탕으로 고산자는 60세 때 최종목적인 지도의 대량 유포와 전사(傳寫)의 오류를 막기 위한 목판본 전국지도인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이우형씨는 우선 <대동여지도>의 할아버지격이자 고산자 자신이 쓴 범례가 기록된 <청구도>와, 지도와는 따로이 비망한 강역표, 국고표, 방위표, 도리표 등을 후일 집대성한 자료인 『여도비지』에 주목했다. 이 작업에서 그는 우선 대강의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산마루와 물줄기는 땅의 근골과 혈맥이다'라는 말에서는 지도 제작의 근본 이념을 알 수 있었죠. 기록된 지명의 정확한 위치는 마지막 글자의 가운데로 하고 여백에 따라 상하 또는 옆으로 적었고, 사방을 12방으로 나누었으며, 읍을 중심으로 겹친 동그라미를 긋고 그 사이를 10리로 간주한다, 높은 산은 포갠 봉우리로 표시하고 나머지는 톱니 모양으로 한다는 등의 대목, 그리고 축척표를 통해 우선 궁금증을 대강 풀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여전히 몇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지도상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인 축척과 지점간의 거리가 그 중 하나였다. 학계에서는 그간 <대동여지도>의 축척을 16만분의 1로 추정하고 있었다. 이는 10리는 4km라는 현재의 거리 개념과, 현대지도와 대동여지도의 도상 지점간 거리나 넓이의 비교에 의거한 수치다. 그러나 고산자 당시에도 10리가 4km에 해당한다는 근거는 어디에고 없었다. 해서 그는 <대동여지도>의 축척표에 나타난 백리척과 <대동지지>에 명기된 거리 규정을 참고하여 대동여지도의 10리는 약 5.4km이며 축척은 21만 6천분의 1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86년 여름 그는 자신의 이 추정을 학계에 발표, 주목을 끌었다.
거리 표시에서 좀체로 풀리지 않는 의문은 도로상 10리 단위를 나타낸 점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대강 찍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까.... 그러나 고문서를 통해 고산자에게 느껴지는 지도에 대한 열정의 농도로 보아 고산자가 스스로에게 그런 태만은 절대 용납치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런 믿음으로 <대동여지도>를 세밀히 살펴 나가던 어느날 그는 중요한 차이를 발견했다. 평야지대는 점간의 간격이 2.5cm로서 거의 일정한데 비해 산지, 특히 금강산역에서는 1.5cm로 크게 좁아지고 있었다. 즉 고산자는 단순 수평거리가 아니라 실제 걷는 거리를 도상에 표현했던 것이다.
현대지도와 정확히 일치
도로상의 거리 표시 하나에도 그런 정성을 들였음을 안 이씨는 각 산맥의 흐름도 대강 그린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엄청난 인내를 요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항공촬영을 하여 만든 현대의 지형도와 그 정확성을 비교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우선 국립지리원 발행의 2만 5천분의 1, 혹은 5만분의 1지형도 전국분을 구입해 능선을 하나하나 그린 다음 25만분의 1지형도에 청사진을 떠 옮겼다. 이어 다시 이것을 50만분의 1지형도로 옮기고 대동여지도도 그와 같은 크기로 축소한 후 겹쳐 보았다. 거의 완벽하게 두 지도- 100여년 전에 만든 <대동여지도>와 항공촬영으로 파악한 현대 지도의 능선 모양은 일치하고 있었다. 그는 감격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 작업 이후 그에게는 새로운 의문이 떠 올랐다. 현대 지형도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은 능선줄기가 <대동여지도>에는 명확하고도 큰 선으로 나타난 지역이 있다는 점이다. 한남정맥(漢南正脈) 끝부분의 김포평야 일대가 특히 그랬다. 그 밋밋한 논바닥에 무슨 이렇게 굵은 산줄기가 있다는 말인가. 답답증에 자다 말고 일어나, '어디, 고산자 당신의 혼백이라도 있으면 나와 보라'고 외치기도 하던 그는 직접 답사에 나섰다. 김포 평야에 가서 논의 모양을 세심히 살펴 보았다. 얼핏 보기에 거의 수평면인 김포평야였지만, 그 평야를 동서로 나누는 이른바 유역 능선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유역릉을 확인한 순간이 전 작업을 통해 가장 감격적이었다고 그는 돌이킨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강줄기가 두 개의 선으로 표현되다가 어느 정도 상류부에 이르면 한 줄로 합쳐진다. 지도제작자에게, 더구나 고산자에게 의미없는 선은 있을 수 없다는 확신 아래 그는 또한 그 의미를 캤다. 강줄기마다 보이는 그 부분들의 공통점을 찾아 보았다. 첫째, 두 선이 합쳐지는 곳의 상류부에서 <대동지지>에 밝혀진 10대 도로와 중요 간로(間路)상의 나루 이름이 발견되지 않았다. 즉, 도선이 올라갈 수 있는 상한점인 것 같았다.
점 하나에도 깊은 뜻 담겨
실제로 확인하기 위해 이우형씨는 낙동강 상류로 가 60여 년 전 사공일을 두 노인을 만나 물었다. (대동여지도)상의 낙동강을 표시한 선이 하나로 합치는 그 지점까지 벼 200섬을 실은 돛배가 운항되었었다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상류에서 흘러 든 나무를 뗏목으로 엮던 곳이라고도 했다. 선이 합해지는 곳은 말하자면 가항점(可航點)-배가 운항될 수 있는 상한점이었던 것이다.
이들 여러 가지의 확인 작업 이후 그는 우리 조상들이 가진 땅에 대해 가졌던 관념을 비로소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 주변의 딴 나라들을 생각해 보았죠. 중국은 허허벌판이 대부분입니다. 반면 일본은 산은 많되 급사면과 협곡이 대부분이죠. 그러므로 두 나라 모두 삶은 산과 크게 유리된 상태에서 이루어져 왔지요. 하지만,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들이 꽉 들어차 있는 우리에게 산은 곧 생활의 터전으로 인식이 되어 왔습니다.그리고 그 산에서 나온 물이 우리가 먹을 양식을 키우고, 또 그 물을 우리가 마시고.... 말하자면 땅이 곧 산이고 산이 곧 물이라는 인식으로 우리 조상들은 살아왔기에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우리의 고지도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평야지대의 능선줄기도 큰 물줄기를 나누는 것일 경우 그렇듯 선명하게 표시했던 겁니다."
김포평야 한가운데에 굳이 그렇게 선명한 산줄기를 표시한 것은 그것이 한남정맥의 원줄기로서 한강의 수계를 이루는 중요한 산줄기이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의 산경(山經) 표현은 네 가지 굵기가 나타난다. 제일 굵은 것은 나라 안의 근골이라 여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대간, 두 번째 굵기는 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큰 강의 울을 이루는 정맥을, 세 번째 굵은 것은 정맥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산줄기로서 대체로 큰 내를 이룬 맥을, 마지막으로 제일 가는 것은 골을 이루는 작은 산줄기를 표현했다. 이런 구분은 물론 고산자만의 유일한 것이 아니라고 이우형씨는 밝힌다.
"조선시대 우리에게는 하나의 대간과 정간, 그리고 13개의 정맥으로 불리는 산맥들이 있었죠. 그 이름의 기준은 모두 강 이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미 조선조 이전부터 산맥에 대한 대강의 구분은 우리 조상들은 해왔습니다. 이를 신경준이 『산경표』로 정리했고, 고산자는 또한 이 구분법을 거의 그대로 차용한 것입니다. 즉, 이런 산맥 표현은 어느 개인의 사고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자연스레 받아들여진 일반적인 인식이었던 겁니다."
있는 둥 만 둥 한 산자락 하나 너머임에도 '거기, 그런 작물은 안 돼'하는 농부들의 단정적인 말이나 고을 이름만 듣고도 거기 사람들은 여자 쪽이 부지런하다느니 모질다느니 하는 노인들의 말은 그런 산줄기와 수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또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기 위한 기본자료로도 <대동여지도>와 같은 자세한 지도는 필수불가결했을 것이다. 이씨는 그런 점에 비추어 보더라도 고산자가 당시에 박해를 받았다는 말은 일제의 의도적인 왜곡이기 쉽다고 주장한다.
"그럴 리가 없었죠. 사료로 보아도 고산자가 박해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대원군과 독대를 할 만큼 큰 권력을 가진 인물들이 그를 후원했다는 사료가 여럿 있지요. 고산자가 골방에 숨어서 딸과 함께 어렵게 작업을 했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말인 것이, <대동여지도> 전도의 크기가 가로 4미터에 세로 8미터입니다. 어떻게 골방에서 그것을 목각하고 수십 권으로 찍고 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그는 말하자면 지리적 지식이 뛰어난 학자이자 편집자로서 전국 각 군과 현으로 기본 도면을 보내 자세한 자료를 받는 등, 중앙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작업을 했던 겁니다."
대량의 정보를 수록해서 읽기가 복잡한 현대지도보다 각지의 수경(水經)을 한결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등 뛰어난 점이 많은 이 <대동여지도>는 하지만 목각상의 어려움 때문에 <동여도>의 지명을 모두 수록하지 못했다. 이에 이우형씨는 현대 인쇄술을 이용, <동여도>에서 누락된 지명 모두를 <대동여지도>에 옮긴 후 3분의 2로 축소, 35장으로 나누어 발행한 것이다. 어지간한 크기의 벽이면 남한 전역만큼은 한 눈에 알아보게끔 붙일 수 있다.
<대동여지도>3분의 2 축소판을 완성하기까지 그가 겪은 난관은 물론 많았다. <대동여지도>의 기본도로서 현존하는 필사본이 세 벌에 불과한 <동여도>를 규장각, 국사편찬위원회 등으로 찾아가, 워낙 희귀한 것이라 복사도 되지 않아 일일이 손으로 베끼는 등 고역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흥분에 가까운 보람으로 차 있다. 이렇게 <동여도>의 지명까지 옮긴 <대동여지도>는 각종 국학관계의 연구는 물론 앞으로 절실히 필요해질 국지(局地)기상예보 등 나라의 일에도 좋은 기초 자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을 맺는다.
되살려 써야 할 지리개념
"우리는 지금까지 일제가 지하자원의 수탈을 위해 세운 태백산맥이니 차령산맥이니 하는 지리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질학에서나 필요한 개념일까, 우리 강토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거의 무용지물인 것이죠. 산에서 비롯된 물줄기의 흐름이 바뀌면 기후나 토양도 바뀌며 거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의 품성도 바뀌는 것인데, 우리는 어처구니없게도 그 일제의 지리 개념에 의해 무감각해진 체 별 생각없이 마구 파헤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조상은 이 땅을 뼈와 피의 흐름을 가진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여겨왔습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는 그런 인식의 구현입니다. 이 <대동여지도>를 통해 잃을 뻔했던, 그 현명했던 땅에 대한 인식을 되찾는 일이 곧 불구가 되어가는 이 강토를 살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