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우리 민족의 시조, 고조선의 첫 임금. 천제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 기원전 2333년 아사달에 서울을 정하고 단군 조선을 세웠다. 단군에 관한 '삼국 유사'의 기록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의 황제인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가 인간을 구원하고자 원하므로, 환인은 천부인(하늘 나라 왕의 표지)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도록 허락하였다. 환웅은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의 신단수에 내려왔는데, 이 분이 환웅 천왕이다. 환웅이 360여 가지 일을 맡아 다스릴 때 곰과 범 한마리가 사람이 되게 하여 달라고 환웅에게 빌었다. 환웅은 쑥 한 줌과 마늘 20쪽씩 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먹으며 굴 속에 있던 중 범은 참지 못하고 도중에 뛰쳐나갔으나, 곰은 잘 참아 내어 37일 만에 여자로 변하였다. 이 웅녀가 아기 갖기를 원하자, 환웅이 잠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함으로써 단군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단군은 인간으로서 처음 왕이 되어 1500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리다가 기자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 주고 아사달에서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동명왕
고구려의 시조(재위 전37~전19). 성은 고, 이름은 주몽.추모.상해.도모. 동부여왕 해부루가 죽고, 금와가 즉위하였는데, 어느날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났다. 유화가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자기를 꾀어 내었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쫓겨났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금와왕은 유화를 데려다 궁중에 가두었다. 그 유화가 햇볕을 받고 임신하여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이 사내아이가 곧 주몽이다. 주몽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씩씩하여 7세가 되자 활도 잘 쏘았다. 그러자, 금와왕의 일곱 아들과 신하들은 시기하여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주몽은 유화 부인의 말에 좋아서 졸본부여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니, 이 나라가 곧 고구려이다. 기원전 36년에 비류국 송양왕의 항복을 받은 다음, 기원전 34년에 성곽을 쌓고 궁궐을 세웠다. 이어서 해인국을 정벌하고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온조왕
백제의 시조(재위 전 18~28). 고구려 시조 동명 성왕의 세째 아들. 동명 성왕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리(큰왕비의 아들)가 내려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형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려 하였으나, 도읍 문제로 의견이 엇갈렸다. 형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 충청 남도 아산군 인주?)로 가고,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광주?, 충청 남도 천원군 입장?)에 도읍을 정하고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얼마 뒤 비류가 죽고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자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다. 기원전 5년 남한산으로 도읍을 옮기고, 9년 마한을 멸망시켰으며, 10년에는 아들 다루를 태자로 세웠다.
박혁거세
신라의 시조. 왕호는 거서간. 전설에 의하면,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의 소벌공이 어느 날 숲속에서 말의 울음 소리를 듣고 다가갔더니, 그 자리에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알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다고 한다. 그 아이가 10여 세가 되자 기골이 빼어나고 총명하여, 의논한 뒤에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기원전 57년 13세에 왕위에 올라 17세 때 왕비를 맞고, 왕비와 함께 전국을 돌면서 농사.양잠을 장려했다. 국호를 서라벌, 서울을 금성이라 정하고 궁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웠다. 사람들은 박과 같이 큰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박(박)이라는 성을 붙였고, 박이 또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에서 혁거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광개토대왕
고구려 제 19대 왕(재위 391~412). 고국양왕의 태자. 이름은 담덕. 12세 때인 386년 태자로 책봉되고 아버지가 일찍 죽자 17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391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영락'이라 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함을 보였다. 392년에는 백제 북쪽의 석현(지금의 재령 부근) 등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켜 한강 북쪽의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396년에는 친히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무너뜨리고 왕의 동생과 그의 대신 10여 명을 볼모로 잡아왔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동쪽 땅을 완전히 차지하였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 명의 원군을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연나라의 모용희를 반격하여 신성.남소 등 두성 700여리의 땅을 갖게 되었다. 405~406년에 모용의 두 번의 침략을 받았으나 요동성. 목저성에서 모두 물리쳤다. 410년 (광개토 대왕 20)에는 동부여를 정복하고, 이어서 북부여를 무릎꿇게 하였다. 그리하여, 랴오허강 동쪽으로부터 중국 동북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 하였다. 작은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그는, 아깝게도 39세로 죽었다. 왕이 된 후 하루도 궁궐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전쟁터를 달려 배달 민족의 영웅으로서 높이 존경받고 있다. 그의 능은 자세하지 않으나, 414년에 장수왕이 만주 봉천 지안현 퉁커우에 세운 광개토 대왕의 능비에 그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묘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이다.
이사부
신라시대 장군. 541년(진흥왕 2) 병부(兵部)의 책임자이자 당시에는 상대등(上大等)·시중(侍中)을 겸할 수 있던 병부령(兵部令)이 되어 562년까지 실권을 장악하였다. 545년에는 국사 편찬을 제안하여 거칠부(居柒夫) 등이 《국사》를 편찬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백결 선생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살았다. 몹시 가난하여 어찌나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었던지 세상에서는 “현순백결(懸百結:가난하여 입은 옷이 갈가리 찢어짐)”의 문자를 빌려 백결선생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악조건 가운데서도 백결선생은 한점 흔들림이 없이 오직 거문고만을 사랑하여 모든 희로애락을 거문고로 풀었다. 어느 해 세모(歲暮)에 집집마다 울려나오는 떡방아 소리를 듣고 부인이 “우리는 무엇으로 과세(過歲)를 합니까”라고 근심하자 거문고로 방앗공이 소리를 내어 위로하였는데, 그 곡조가 후세에 전하여 《대악(樂)》이란 이름이 붙었다.
의자왕
의자(義慈)는 휘(諱)로서, 그는 왕의 시호가 없다.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33) 태자로 책봉되었다.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었다. 642년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이어 윤충(允忠)으로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함락시켜 성주인 품석(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듬해에도 당항성(黨項城:남양)을 빼앗아 신라가 당(唐)나라로 가는 입조(入朝)의 길을 막는 등 국위의 만회에 힘썼다.
계백
백제 말기의 장군.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르렀다.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