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보니 “매니페스토 지지단체장 네트워크”라 쓴 현수막 앞에 일부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서있는 화면을 보여주면서 “매니페스토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라고 보도했다. 현수막에 쓰인 14자 가운데 9자가 영어다. 네트워크는 대충 “전국망”이란 뜻으로 알고있는 영어라 치더라도 매니페스토는 처음 듣는 소리다.“매니페스토 지지단체장 네트워크”가 무슨 뜻인지 아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필자도 “매니페스토운동”이란 말을 처음 한국 방송에서 들었을 때 무슨 운동인지 몰랐다. 그래서 신문을 보니 똑같은 제목이 붙어있었다. 기사를 읽기 전에는 무슨 내용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정당들과 선거 후보자들이 집권 또는 당선 후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다고 약속한 공약들이 나중에 정말로 실천되는가를 확인해보자는 것이 매니페스토 운동이라고 한다. 그런 내용이라면 “공약실천 확인운동”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수 있는데, 왜 굳이 영어를 섞어 ”매니페스토운동“이라고 하는지 알수가 없다.
manifesto는 ‘정치적 선언’이란 뜻이다. 19세기 공산주의 이론가 Marx와 Engels의 합작품인 Communist Manifesto(공산주의 선언) 같은 것이 manifesto다. 영국에서는 manifesto가 “선거공약‘이란 뜻으로도 쓰이지만, 미국영어에서는 선거공약이란 뜻으로 쓰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선거공약을 platform이라 한다.
영국에서만 통하는 manifesto의 의미를 가져와 ”매니페스토 운동“이라고 한것도 그렇지만,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무슨 뜻인지 알수가 없는 명칭을 왜 굳이 쓰는지 묻고 싶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모든 사람이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공약실천 확인운동“이라고 고치도록 권한다. 꼭 영어가 들어가야만 품위와 권위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한국 지식사회에 너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이런 건 언어적 사대주의다.
2월24일 한 방송사는 저녁 뉴스시간에 “앞으로의 주택 대출은 기존의 집 가치 대신 대출자의 소득수준, 즉 DTI 기준으로 완전히 바뀌게 됐습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뉴스를 보도했다.“대출자의 소득수준 즉 DTI 기준으로”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DTI는 “소득수준”을 가리키는 영어 약자인것 같다. 그렇다면 굳이 DTI란 영어를 쓸 필요가 없을터인데, 계속 DTI를 네번이나 더 썼다. 그러면서도 DTI가 무엇인지 한번도 설명하지 않았다. DTI의 뜻을 아는 사람만 이 뉴스를 듣고 모르는 사람은 듣지말라는 투다.
DTI는 정확히 DTI비율이라고 하든지 DTIR 이라고 써야 맞다. DTIR은 주택담보대출 신청자의 소득(Income) 대비(to) 부채(Debt) 비율(Ratio) 즉 Debt To Income Ratio의 약자다. 여기서 부채란 대출자가 연간 상환해야하는 원리금 합계를 가리킨다. DTIR을 한국에서는 “총부채상환비율”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소득대비부채비율”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번역이 될뿐만 아니라 누구나 금방 알아들을수 있다. 미국에서는 DTIR이 대개 30%정도다. 예컨대, 연간 소득이 10만불인 사람이 집을 사려고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고 할 때 그가 1년간 모든 금융기관에 갚아야할 돈이 3만불이상이 되면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방송언어에 있어서의 외국어 특히 영어 남용의 예는 웰빙과 리베이트에서도 나타난다. well-being(웰 빙)은 못사는 것의 반대인 잘사는것, 아픈것의 반대인 건강, 그리고 안전하지 못한것의 반대인 안전(안녕)이란 뜻일 뿐인데, 한국에서는 웰빙이 “먹어도 살 안찌고 영양가 있는”이나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란 뜻으로 쓴다. 언제는 잘먹고 잘사는 것을 바라지 않고 살아오기나 한것처럼 새삼스럽게 웰빙을 아무데나 갖다붙이는 이유를 알수가 없다. 웰빙의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그저 영어가 들어가야 그럴듯해서 웰빙을 쓰는 것 같다.
또 rebate(리베이트)는 정당하게, 합법적으로 돈을 되돌려주는 것인데도 한국에서는 불법적으로 은밀히 건네주는 돈을 뜻하는 것으로도 쓰고 있다. 예를 들면 공무원이 업자에게 높은 가격으로 수의계약을 해주고, 업자로부터 사례금조로 몰래 받는 돈을 리베이트라고 쓰고 있다. 이런 검은 돈은 리베이트가 아니라 kickback(킥백)이라 한다. 우리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외국어로 대신하는 것 까지는 좋으나 그 뜻을 제대로 알고 쓰자는 얘기다.
방송은 물론 신문도 로드맵(roadmap)이란 단어를 많이 쓰는데, 청사진이나 지침, 길잡이같은 말 놔두고 굳이 일반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로드맵을 써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최근에 한 TV 기자는 “통일장관의 이번 발언이 핵문제 해결에 레버리지로 사용하려는 의도인지 불분명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지렛대”란 좋은 우리말 놔두고 왜 꼭 leverage(을레버리쥐)란 영어를 발음을 틀리게 하면서까지 쓰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 조류독감이 국내에서 발생했을 때 한 방송사는 뉴스 보도 중 계속 AI란 영어만 사용했다. AI 는 Avian Influenza (에이비언 인훌루엔자) 즉 조류독감의 약자이다. 미국 방송 아나운서들도 줄여서 쓰지 않는 Avian Influenza를 토플성적 세계 최하위권의 한국에서는 AI 라고 줄여 쓰고 있다.
요즘 언론은 또 야당 대선 주자들이 서로 네가티브 선거운동을 한다고 비난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네가티브 선거운동이란 용어는 미국의 negative campaign에서 앞 단어만 싹뚝 잘라온 것 같은데, 이것도 “인신공격성 선거운동”이라고 하면 모두가 다 알아들을수 있는데 굳이 영어를 쓰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실 영어 negative campaign 자체도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negative(부정적)의 반대는 positive(긍정적)이다. 경쟁자의 결점이나 부족한 점을 부각시켜야 자기가 이기는 상황에서 선거운동을 어떻게 긍정적으로만 할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negative 선거운동이란 용어보다는 우리말 “인신공격성 선거운동”이 훨씬 더 정확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베이징에서 개최된 동계 아시안게임 시상대에서 한국 선수들이 “백두산은 우리땅”이라고 쓴 카드를 들고 “깜짝 쑈”를 벌였을 때 한국 언론은 “백두산 세리모니”라고 보도했다. 또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고 그 기쁨을 좀 튀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골 세리머니”라고 보도하는 것도 보았다. ceremony(세러모니)란 기념식 같은 무슨 “의식”을 가리킨다. 미국에서 30년 이상 살았어도 필자는 ceremony가 “골 세리머니”에서와 같이 쓰이는 예를 본일이 없다. 축구의 본고장 영국에서 쓰는 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 영국인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goal ceremony는 들어본 일이 없다 한다. ceremony 대신 celebration(쎌러브레이션-축하)을 쓰면 또 모르겠는데, 세리머니라니 적당한 단어 같지 않다. 차라리“깜짝 쑈”란 말로 대신하는게 좋겠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 방송 언어가 어려운 한자어를 너무 많이 쓴다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의 주요 방송사 뉴스는 고학력 지식인층은 대개 볼 것 없다고 외면하고, 신문을 보지 않는 일반 서민들이 많이 시청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방송 뉴스 앵커들과 기자들은 고학력 지식층이 아니면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예사로 쓰고 있다.
2005년 KBS 입사지원자 700여명 중 약 50%가 국어능력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았다고 한다. 방송 일을 하겠다는 사람의 국어능력이 이 정도이면, 고학력이 아닌 일반 방송 시청자들의 국어 능력은 어떻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 방송사 뉴스 진행자들과 기자들은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구어체(口語體)는 놔두고, 글로 쓰지 않으면 그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려운 문어체(文語體), 그것도 한자어로 구성된 말들을 남용하고 있다. 쉬운 우리말을 쓰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일부러 어려운 한자어나 외국어를 골라 쓰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옛날부터 방송인들이 써온 말투를 아무 생각없이 그대로 본받아 되풀이 하고있는 것은 아닐까?
방송은 신문과는 달라 구어체 즉 말을 할 때 쓰는 단어들을 주로 써야하고, 글로 써야 그 뜻을 분명히 알수있는 문어체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도 필자가 지난 1년간 모은 예를 보면, 한자로 된 문어체 문장들이 너무 많다. 교육 수준이 높지 않은 사람들은 방송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한 태도다. 그렇잖아도 방송 시청율이 낮아지고 있는 이때 방송사들은 스스로 시청자들을 쫓아버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깊이 반성해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족인 예를 들어 보겠다.
서울의 한 어린이 놀이터에서 사고가 났을 때 한 TV 방송 뉴스 앵커는 이렇게 말했다.
“안전사고 방지는 안전불감증의 척결이 관건입니다.”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시청자가 얼마나 될까? 그냥 사고면 사고지 안전사고는 무엇이며, 또 안전불감증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척결과 관건은 또 무엇인가?
“항상 조심하고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사고는 막을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누구나 알아들을수 있는 말을 꼭 “안전사고 방지는 안전불감증의 착결이 관건입니다”라고 해야 하나?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필자가 위성을 통해 한국의 방송 4사(KBS, MBC, SBS, YTN) 뉴스를 시청하면서 발견한 문어체 (글로 써야만 그 뜻을 정확히 알수있는 문장) 들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필자가 쉽게 써본 것)
* 이번에 치어 죽은 개도 유기견이었습니다 (이번에 죽은 개도 버려진 개였습니다)
*성폭행 용의자 강씨의 여죄를 추궁중입니다.(강씨가 지은 다른 죄가 더 있는지 캐고있습니다)
*북한의 항공기와 무기가 노후되었습니다.(낡았습니다) / 방송 기자는 노후란 말은 다섯 번이나 쓰면서 낡았다는 말은 한번도 안 썼다.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값이 싸기 때문에)
* 이계안씨의 출마 의사 표시로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 경선이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김장관은 “저출산이 계속되면 재난적 상황이 야기될것”이라고 말했습니다.(여성들이 아기 낳는 것을 계속 꺼려하면 나라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백남순 북한 외무상은 오랫동안 지병을 앓아왔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 전 대통령이 어제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오래 병을 앓다가 별세했습니다)
‘지병’은 ‘오래 앓아온 병’이란 뜻인데, 모르긴 몰라도 방송 시청자의 대부분, 특히 젊은이들은 ‘지병’이 무슨 병 이름인줄 알고 지병이 도대체 무슨 병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천주교 성직자가 돌아가시면 선종, 불교 성직자가 돌아기시면 입적이라고 하는데, 그냥 “돌아가셨다” 또는 “별세했다”고 하면 안되나? 종교인들끼리는 서로 알아듣는 말이지만 일반 대중은 모르는 말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해 야당이 어떻게 나올까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큰 관심꺼리입니다)
*폭우가 지금은 소강상태입니다. (한풀 꺾였습니다)
*노조는 강경 대응을 시사했습니다.(강경하게 대응하겠다는 뜻을 비쳤습니다)
* 오늘 주가 상승에는 유가의 대폭하락이 원군(援軍)이었습니다.(오늘 주가가 오른 것은 기름값이 많이 내린 덕분이었습니다.)
*이 문제해결의 관건(관껀이라고 발음 안해 더 이상)은... (관건 대신 열쇠라고 하면 안되나?)
*정부는 양극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빈부 격차를 줄이긴 위한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 연정을 구성할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습니다.(연립정부를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방송기자도 “연정”만 계속 사용하고 한번도 “연립정부”란 말 안썼다. 연정의 뜻을 아는 국민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
*T-50기가 굉음을 내며 하늘로 치솟았습니다.(요란한 소리를 내며) ‘굉음을 낸다“는 말은 옛날부터 기자들이 상투적으로 써오던 말이지만 굉음이 도대체 어떤 소리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서훈 박탈 추진...(전두환, 노태우에게 준 훈장을 취소하기로)...
*우리 기업의 블루 오션을 찾아야 한다./블루 오션(남이 하지 않는 분야)의 뜻을 설명하지 않고 마구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군인들이 남은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있습니다.(내보내고 있습니다)
*세수 부족으로 각종 소비세 인상 러시가 예상됩니다, (걷어들이는 세금이 줄어들어 각종 소비세가 줄줄이 오를 것 같습니다)
*연락마저 두절되었습니다. (끊겼습니다)
*거리로 나온 맷돼지를 포획하는데 실패했습니다.(잡지못했습니다.)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화상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화상들이 속속 입국하고 있습니다.(중국계 상인들이) /필자는 화상이 art dealer(그림 장사)인줄 알았다. 뉴스가 끝날 무렵 화면에 보이는 한자를 보고야 알았다.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이달 말까지 발권을 해야 할인혜택을 받을수 있습니다.(표를 사야)
*노조는 총파업도 불사할수있다고 선언했습니다.(할수있다고)
*기부문화의 대기업 편중이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다른 어떤 개인이나 단체보다 대기업들이 기부를 점점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댓글의 익명성 때문에...(본명을 밝히지 않고 올리는 댓글 때문에...)
*화재 발생 시각이 바로 일몰 직전이라.....(해가 지기 직전에 불이 났기 때문에)
*왕년의 아역 배우 김진만씨의 최근 근황을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전에 어린이 배우로 활동했던 김진만 씨의 요즘 모습을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FTA 2차협상은 파행으로 끝났습니다. (잘 되지 않았습니다)
*설농탕용 파채를 실온에 방치하여 박테리아가 득실거립니다.(냉장고에 넣지 않아)
*냉동실 영아유기 사건 (냉동실에 갓난 아기를 버린 사건)
*어린이가 낙뢰를 맞아 크게 다쳤습니다. (벼락을 맞아)
* 전 항공편이 결항되었습니다. (모든 비행기가 뜨지 못했습니다.)
*북 2차 핵실험 유예할지도 (북한... 안할지도)
*정지영씨 번역료 전액 환원키로 (돌려주기로)
*권행정관이 권양숙 먼 친척이라는 소문은 사실무근이라고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발표했습니다(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범인은 오리무중입니다. / 범인의 행방이 묘연합니다.(범인이 어디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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