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권 산

밤티재~속리산~문장대~신선대~청황봉~피앗재~형재봉~갈령삼거리~비재 (1)

울산 금수강산 2008. 8. 3. 09:38

1. 언제 : 2008. 8/2(토요일)

2.어디서:밤티재~문장대~신선대~청황봉~피앗재~형재봉~갈령삼거리~비재

3. 날씨 : 흐림후 비조금

4. 왜: 종주

5. 누구랑 : 원조우산악회 

 

 

 

 

 

 

남진 22 구간

속리산권

늘재-3.3-밤티재-4.45-문장대-1.17-신선대-2.58-천황봉-5.66-피앗재-1.56-형재봉-0.7-갈령삼거리
9.82Km 1,408m 6.45Km 1,084m 15.96Km 19.42Km 470.11Km
갈령-1.2-갈령삼거리 1.20Km 당일
20.62Km  

남진 23 구간 속리산권
갈령삼거리-4.15-비재-3.85-봉황산-1.45-산불감시초소-3.26-화령재-1.87-윤지미산-4.41-무지개산-4.27-신의터재
10.28Km 1,248m 12.42Km 1,692m 22.38Km 23.26Km 493.37Km
갈령삼거리-1.2-갈령 1.20Km 무박
24.46Km  

 

 

 

 

 

 

 

 

 

 

 

 

 

 

 

 

 

 

 

 

 

 

 

 

 

 

 

 

 

 

 

 

 

 

 

 

 

 

 

 

 

 

 

 

 

 

 

 

 

 

 

 

 

 

 

 

 

 

 

  

 

 

 

 

 

 

 

 

 

 

 

 

 

 

 

 

 

 

 

 

 

 

 

 

 

 

 

 

 

 

 

 

 

 

 

 

 

 

 

 

 

  

 

 

 

 

 

 

 

 

 

 

 

 

 

 

 

 

 

 

 

 

 

 

 

 

문장대

문장대는 일명 운장대(雲藏臺)라고도 하였다. 글자 그대로 구름 속에 웅장한 대의 위용을 간직하고 있는 봉우리다.

문장대라고 하는 이름의 유래는 조선 초기에 세조가 피부병 치료 차 속리산에 들어와 요양하던 시기의 행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곧 그 당시 꿈속에 월광태자(月光太子)라 하는 귀공자가 나타나 왕에게 동쪽으로 시오 리(里)를 오르면 영험한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그곳에 올라 기도를 드리면 소원성취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세조가 이튿날 조신들과 더불어 향(香)과 축(祝)을 싸들고 산꼭대기를 헤메어 이윽고 한 영롱한 멧부리에 올랐더니,

널따란 바위봉우리 위에 삼강오륜을 설파한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세조는 꿈속의 계시에 새삼 탄복하며 엎드려 기도한 후 책장을 넘기면서 신하들과 강론하였다. 이로부터 문장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문신 박효수(朴孝修·?-1377)의 우제속리사시(偶題俗離寺詩)에 ‘문장대 위엔 천고의 이끼 덮이어 있고

(文藏臺封千古蘚)’라고 한 시구를 보더라도 이미 고려시대에도 문장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등 역대 지리지에서는 모두 문장대를 동쪽의 낙동강, 남쪽의 금강, 북쪽의 달천으로 흘러가는 세칭 삼파수(三派水)의 발원지로 언급하고 있다.

곧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대 위에는 구덩이가 가마솥만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뉘어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가서 달천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