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행

600년 왕국, 잠에서 깨어나다

울산 금수강산 2006. 12. 18. 20:23

▲ 해자 물속에 비친 앙코르와트사원. 옆으로 유일한 진입로인 다리와 나가 테라스가 보인다. 라테라이트로 만든 붉은색 담장이 특이하다.
ⓒ2004 김정은
역사 속에 잊혀진 도시 앙코르

“그곳은 죽음의 왕궁, 선잠이 든 왕궁처럼 보였다. 성문 앞에 난 길 양쪽에는 3m쯤 되는 돌거인들이 서 있었다. 거인들은 머리 일곱 개 달린 큰 뱀을 안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 모습은 옛날 인도 병사 같았다. 성문 안쪽에는 이교(異敎) 선녀가 춤추는 모습과 코끼리, 병사, 꽃무늬 들이 새겨 있었다. 난 너무 놀라 숨이 멎거나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1850년 뷰오 신부가 톤레삽 호수 일대 밀림지대를 헤매다 우연히 목격한 앙코르와트를 기술한 글을 살짝 들여다 보면 마치 잃어버린 세계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 모험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 흥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 분위기 탓에 뷰오 신부의 밀림 속 도시 목격담은 당시 프랑스 사람들에게 헛소리로 치부되고 말았다.

앙코르와트를 진지한 태도로 접근한 사람은 1855년 탐험가이자 생물학자인 프랑스인 앙리 무어 박사였다. 그는 우연히 중국인이 쓴 '진랍 풍토기’라는 제목의 역사책을 얻었다. 그는 이 책 속에 언급한 진랍왕국이 당시 캄보디아 역사책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진랍왕국은 어디에 존재하고 있었을까? 혹 뷰오 신부가 봤다는 그 밀림 속 도시가 아닐까?

이와 같은 앙리 무어의 호기심은 드디어 부근 원주민들의 전설 속에서만 저주받은 성으로 존재할 뿐 자국민의 역사에서조차 잊혀졌던 거대한 600년 왕국, 앙코르제국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무어는 프랑스 잡지에 '문명 세계에 보내는 미개지 탐험 보고서’라는 내용의 앙코르와트 탐험기를 올린 지 몇 달 후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혹 원주민이 얘기했다던 전설 속의 저주가 내려진 것일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웅장한 앙코르와트 돌무더기를 처음 발견한 뷰오 신부의 자세하고 정확한 묘사가 놀랍다. 그는 목격담에서 거인(악의 신과 선의 신)과 힌두교에서 머리 일곱 개 달린 뱀의 신 '나가', 이교 선녀로 묘사된 천상의 무희 '압살라'를 정확하게 묘사했다.

또 돌 벽 속에 새긴 병사들이 비록 모두 인도인은 아니지만 벽화의 반 정도가 인도의 힌두설화를 묘사한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앙코르와트를 처음 목격했을 때 별 자료 없이 순전히 느낌만으로 인도풍을 느꼈다는 것은 그가 매우 민감한 안목을 지닌 소유자임을 말해준다.

수르야바르만 2세의 필생의 안식처 앙코르와트 사원

▲ 진입로 난간에서 앙코르와트쪽을 바라보고 서있는 사자상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려는 이방인의 콧대를 또한번 꺾어놓는다.
ⓒ2004 김정은
크메르어로 "도시"라는 뜻의 앙코르와 태국어로 "사원"을 뜻하는 와트는 앙코르 유적군 전체를 지칭하는 넓은 의미의 앙코르와트와 앙코르와트 유적군 내에서 대표적인 사원인 앙코르와트를 지칭하는 좁은 의미의 앙코르와트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매우 헷갈리기 쉽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그만큼 앙코르와트 유적군 내에서 좁은 의미의 앙코르와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뜻이다(필자 주 :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금부터 전체 앙코르와트를 지칭할 때는 앙코르와트 유적이라고 하고 좁은 의미의 앙코르와트는 앙코르와트 사원이라고 지칭한다).

그래서일까? 앙코르와트 유적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된 앙코르와트 사원은 맨 처음 어마어마한 규모의 해자로 시끄러운 방문객의 기를 우선 꺾어 놓은 다음 해자 속에 비친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사원의 그림자로 방문객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신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잠시 영혼을 정화시켜야 한다는 뜻일까?

하긴 고대 크메르 건축에서 해자는 인간계와 신계를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물길이다. 쉽게 말해 인간의 접근을 금지하는 신성한 곳을 상징하는 구조물이었다. 흔히 우리나라 몽촌토성이나 다른 나라의 성 둘레에서 볼 수 있는 해자의 용도가 적군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인데 비해 이 곳의 해자는 종교의 의미가 강한 구조물이다.

규모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곳의 크기는 대략 해자 폭이 200m,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단단하다는 붉은색 라테라이트 벽돌로 둘러싼 사원의 담 둘레가 약 5.6km 정도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힘든 규모다.

이 엄청난 규모의 해자에는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진입로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진입로 난간에는 사자상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려는 이방인의 콧대를 또 한번 꺾어놓는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너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 앙코르와트 사원의 탑문. 벽면의 부조와 압살라, 크메르양식의 창문모양의 부조가 특이하다.
ⓒ2004 김정은
앙코르와트 사원은 앙코르제국의 18대 왕인 수르야바르만 2세(1113년~1150년)가 힌두교의 비쉬누 신에게 봉헌하기 위해 즉위부터 사망까지 무려 37년 동안 건설한 사원으로 일설에는 수르야바르만 2세가 사후 자신이 묻힐 영생의 집으로 건축했다고도 한다. 그는 삼촌의 왕위를 빼앗아 당시 2개로 갈라진 왕국을 통일하고 앙코르제국의 전성기를 연 왕으로 유명하다.

▲ 탑문 너머로 까마득히 보이는 명예의 테라스
ⓒ2004 김정은
그런데 현재 캄보디아 사람들의 종교는 이웃 태국과 마찬가지로 거의 불교인데 왜 유독 앙코르유적지에는 힌두교의 자취가 많은 것일까? 그 이유는 캄보디아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 역사상 최초의 왕국인 푸난 왕국의 건국신화를 보면 왕국의 시조가 바다를 건너 온 인도의 브라만계급 남자와 현지 크메르족 여인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초기 종교가 힌두교였다고 볼 수 있다. 인도계의 피가 섞인 탓일까? 그러고 보니 실제 캄보디아인들의 외모는 태국인에 비해 훨씬 더 까무잡잡한 편인데다 이목구비도 왠지 달라 보이는 것 같다.

앙코르 제국이 태동한 시기는 푸난 왕국과 첸라 왕국 시대를 거쳐 첸라 왕국이 부근 자바 왕국에 망한 후 당시 볼모로 잡혀갔던 첸라 왕국의 왕자인 자야바르만 2세가 795년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하여 자바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802년 왕국을 건국하면서부터다.

그 후부터 샴(태국)의 아유디야 왕조의 지배를 받기까지 600여년 동안 번영을 누려온 앙코르 왕국. 그런데 왜 이 거대한 왕국이 한동안 그네들의 역사 속에서 잊혀진 것일까? 대단한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 장서각. 이 장서각의 존재를 보면 비록 지금은 소실되어 버렸지만 그들 스스로 남긴 기록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든다.
ⓒ2004 김정은
앙코르와트를 통해 실제 목격한 그들의 문화수준은 매우 훌륭해서 당연히 그들 스스로 남긴 기록도 있었을 법한데 현재 기록 하나 남아있는 것이 없고 단지 남은 기록이란 중국인의 눈으로 본 것과 인근 국가의 역사 속에 간혹 등장하는 관련 기록들과 사원 벽면의 부조들을 근거로 외지인들이 모자이크하듯 짜맞춘 기록이 전부다.

난 이 왕국의 문명이 어쩌면 현재 알려진 것보다 더 대단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마치 중국 사서에 단 몇 줄로 묘사된 우리나라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을 봐도 쉽게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혹 후에 태국의 지배시기부터 수많은 식민지 시절을 겪어오는 동안 기록들이 모두 소실된 것은 아닐까? 이는 앙코르와트 사원에 있는 장서각의 존재로도 상상이 가능하다.

▲ 명예의 테라스에 가기 전 군데 군데 볼 수 있는 머리 일곱 달린 뱀의 신 나가가 조각된 테라스. 장서각을 지나 나오는 수련이 핀 연못이 나가 테라스 너머 보인다.
ⓒ2004 김정은
이런 저런 상상에 빠져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다리 건너 탑문에 도착했다. 세밀하기 그지없는 벽면의 부조들과 크메르양식의 창문과 압살라 부조를 감상하다 보니 탑문 너머로 앙코르와트 사원의 목적지인 신전을 나타내는 명예의 테라스가 까마득하게 보인다.

저 까마득하게 보이는 신전까지 가기 위해서는 장서각과 연못을 지나 야자나무가 멋지게 도열한 길을 열심히 걸어야했고 걸어가는 동안 이곳을 나타내는 상징인 머리 7개 달린 뱀의 신 나가 테라스와 사자상에 걸음을 멈춰 그 생소하지만 멋들어진 조각에 감탄해야 했다.

신전의 입구를 알리는 명예의 테라스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앙코르와트 유적의 이모저모

▲ 앙코르와트 탑문 지붕벽의 정교한 부조

앙코르와트 유적 입장권은 미화 기준으로 1일권은 20달러, 3일권은 40달러, 7일권은 60달러로 비싼 편이다. 3일권 이상은 본인 사진을 첨부해야 한다.

워낙 입장료가 비싸다보니 무단 입장객을 색출한다는 취지에서 간혹 입장권 검사를 하는데 주로 화장실에서 많이 당한다고 한다.

이곳 화장실은 매우 깜깜하다. 그 이유는 앙코르와트 유적 내에는 유적 보존을 위해 전기시설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장실에 처음 들어갈 때면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깜깜해서 순간 당황하게 된다.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인 이곳을 복구하기 위해 현재 일본이 대대적인 복구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일설에는 워낙 앙코르와트 유적 복구가 지지부진하다보니 일본에서 자금을 지원하느니 자신들에게 전적으로 유적복구를 맡겨달라고 했단다. 유적 복구를 맡겨준다면 모든 자금을 동원하여 단시일 내에 깔끔히 복구를 완성하겠노라고 말이다. 단 유적 복구후 입장료는 모두 자신들이 가져간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현재 캄보디아 재정에서 앙코르와트 유적 입장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데 일본의 이런 제의가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하여간 앙코르와트에 쏫는 일본인의 정성은 대단한데 그 때문인지 유적지 내에서도 수많은 일본 관광객과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캄보디아인 가이드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니 뭐니하며 유창한 일본어로 자세한 안내를 하는 캄보디아 가이드를 보면서 은근히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와서 앙코르와트 유적의 자세한 안내를 받고 싶다면 일일 가이드를 고용할 수 있는데 일일가이드의 구사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이며 유감스럽게도 한국어는 없다. 언제나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캄보디아인 가이드를 구경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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