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죽음의 왕궁, 선잠이 든 왕궁처럼 보였다. 성문 앞에 난 길 양쪽에는 3m쯤 되는 돌거인들이 서 있었다. 거인들은 머리 일곱 개 달린 큰 뱀을 안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 모습은 옛날 인도 병사 같았다. 성문 안쪽에는 이교(異敎) 선녀가 춤추는 모습과 코끼리, 병사, 꽃무늬 들이 새겨 있었다. 난 너무 놀라 숨이 멎거나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1850년 뷰오 신부가 톤레삽 호수 일대 밀림지대를 헤매다 우연히 목격한 앙코르와트를 기술한 글을 살짝 들여다 보면 마치 잃어버린 세계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 모험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 흥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 분위기 탓에 뷰오 신부의 밀림 속 도시 목격담은 당시 프랑스 사람들에게 헛소리로 치부되고 말았다. 앙코르와트를 진지한 태도로 접근한 사람은 1855년 탐험가이자 생물학자인 프랑스인 앙리 무어 박사였다. 그는 우연히 중국인이 쓴 '진랍 풍토기’라는 제목의 역사책을 얻었다. 그는 이 책 속에 언급한 진랍왕국이 당시 캄보디아 역사책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진랍왕국은 어디에 존재하고 있었을까? 혹 뷰오 신부가 봤다는 그 밀림 속 도시가 아닐까? 이와 같은 앙리 무어의 호기심은 드디어 부근 원주민들의 전설 속에서만 저주받은 성으로 존재할 뿐 자국민의 역사에서조차 잊혀졌던 거대한 600년 왕국, 앙코르제국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무어는 프랑스 잡지에 '문명 세계에 보내는 미개지 탐험 보고서’라는 내용의 앙코르와트 탐험기를 올린 지 몇 달 후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혹 원주민이 얘기했다던 전설 속의 저주가 내려진 것일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웅장한 앙코르와트 돌무더기를 처음 발견한 뷰오 신부의 자세하고 정확한 묘사가 놀랍다. 그는 목격담에서 거인(악의 신과 선의 신)과 힌두교에서 머리 일곱 개 달린 뱀의 신 '나가', 이교 선녀로 묘사된 천상의 무희 '압살라'를 정확하게 묘사했다. 또 돌 벽 속에 새긴 병사들이 비록 모두 인도인은 아니지만 벽화의 반 정도가 인도의 힌두설화를 묘사한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앙코르와트를 처음 목격했을 때 별 자료 없이 순전히 느낌만으로 인도풍을 느꼈다는 것은 그가 매우 민감한 안목을 지닌 소유자임을 말해준다. 수르야바르만 2세의 필생의 안식처 앙코르와트 사원
그러나 바꿔 말하면 그만큼 앙코르와트 유적군 내에서 좁은 의미의 앙코르와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뜻이다(필자 주 :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금부터 전체 앙코르와트를 지칭할 때는 앙코르와트 유적이라고 하고 좁은 의미의 앙코르와트는 앙코르와트 사원이라고 지칭한다). 그래서일까? 앙코르와트 유적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된 앙코르와트 사원은 맨 처음 어마어마한 규모의 해자로 시끄러운 방문객의 기를 우선 꺾어 놓은 다음 해자 속에 비친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사원의 그림자로 방문객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신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잠시 영혼을 정화시켜야 한다는 뜻일까? 하긴 고대 크메르 건축에서 해자는 인간계와 신계를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물길이다. 쉽게 말해 인간의 접근을 금지하는 신성한 곳을 상징하는 구조물이었다. 흔히 우리나라 몽촌토성이나 다른 나라의 성 둘레에서 볼 수 있는 해자의 용도가 적군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인데 비해 이 곳의 해자는 종교의 의미가 강한 구조물이다. 규모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곳의 크기는 대략 해자 폭이 200m,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단단하다는 붉은색 라테라이트 벽돌로 둘러싼 사원의 담 둘레가 약 5.6km 정도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힘든 규모다. 이 엄청난 규모의 해자에는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진입로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진입로 난간에는 사자상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려는 이방인의 콧대를 또 한번 꺾어놓는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너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들 역사상 최초의 왕국인 푸난 왕국의 건국신화를 보면 왕국의 시조가 바다를 건너 온 인도의 브라만계급 남자와 현지 크메르족 여인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초기 종교가 힌두교였다고 볼 수 있다. 인도계의 피가 섞인 탓일까? 그러고 보니 실제 캄보디아인들의 외모는 태국인에 비해 훨씬 더 까무잡잡한 편인데다 이목구비도 왠지 달라 보이는 것 같다. 앙코르 제국이 태동한 시기는 푸난 왕국과 첸라 왕국 시대를 거쳐 첸라 왕국이 부근 자바 왕국에 망한 후 당시 볼모로 잡혀갔던 첸라 왕국의 왕자인 자야바르만 2세가 795년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하여 자바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802년 왕국을 건국하면서부터다. 그 후부터 샴(태국)의 아유디야 왕조의 지배를 받기까지 600여년 동안 번영을 누려온 앙코르 왕국. 그런데 왜 이 거대한 왕국이 한동안 그네들의 역사 속에서 잊혀진 것일까? 대단한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난 이 왕국의 문명이 어쩌면 현재 알려진 것보다 더 대단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마치 중국 사서에 단 몇 줄로 묘사된 우리나라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을 봐도 쉽게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혹 후에 태국의 지배시기부터 수많은 식민지 시절을 겪어오는 동안 기록들이 모두 소실된 것은 아닐까? 이는 앙코르와트 사원에 있는 장서각의 존재로도 상상이 가능하다.
저 까마득하게 보이는 신전까지 가기 위해서는 장서각과 연못을 지나 야자나무가 멋지게 도열한 길을 열심히 걸어야했고 걸어가는 동안 이곳을 나타내는 상징인 머리 7개 달린 뱀의 신 나가 테라스와 사자상에 걸음을 멈춰 그 생소하지만 멋들어진 조각에 감탄해야 했다. 신전의 입구를 알리는 명예의 테라스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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