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완)

호남정맥(9차)과치재~연산~방아재~만덕산~호남정맥중간지점~선돌고개~국수봉~노가리재

울산 금수강산 2013. 9. 16. 16:46

 

1. 언제 : 2013. 9.15 (일요일)

2.어디서:과치재~연산~방아재~만덕산~호남정맥중간지점~선돌고개~국수봉~노가리재

3.날씨:맑음

4. 왜:종주

5. 누구랑:양산 산바라기

 

 

 

 

만덕산/萬德山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운암리, 문학리, 용대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 575m이다.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운암리·문학리·용대리에 걸쳐 솟아 있다. 만인에게 덕을 베푸는 산이라는 뜻으로 만덕산(萬德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산에는 산신제단·신선바위·물통구리전망대·신선화장실바위·고깔바위 등이 있으며, 주봉우리인 할미봉(할미바위)에 오르면 광주의 무등산을 비롯하여 불태산·병풍산·추월산·백아산·모후산이 펼쳐진다. 산 아래로는 담양 창평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덕산과 등산로를 따라 이어져 있는 산과 고개들은 수양산·국수봉·노가리재·방아재 등으로, 만덕산을 지나 수양산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호남정맥중간지점(영취산에서 백운산까지 이어지는 462km 구간의 중간지점)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만덕산 아래의 마을들은 만덕산에서 흐르는 석간수를 식수로 사용하여 예로부터 병 없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산 중턱에 천마폭포 또는 물통구리(물통거리)라 부르는 계곡물이 약효가 있다 하여 병을 앓는 환자들이 모여들었으나 객지 병자들의 출입을 싫어하는 주민들에 의하여 폐쇄되었다고 한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김인후(1510~1560)의 자는 후지(厚之)요, 호는 하서 혹은 담재이다. 본관은 울산. 1510년(중종 5)에 장성현 대맥동리(지금의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태어나 1560년(명종 15)에 5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 부터 장성의 신동이요 천하 문장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크다가 18세 때에 기묘사화로 동복(지금의 전남 화순)에 귀양와 있던 신재 최산두(1483~ ?)를 찾아가 학문과 삶의 자세를 배운다. 22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4세 때에는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세자 시절 인종을 가르치게 된다. 35세 때 인종은 중종을 이어서 왕위에 올랐으나 이듬해 갑작스럽게 승하한다. 하서는 인종의 승하를 계기로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장성을 돌아와 후학에 힘쓴다. 사후 1796년(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과 옥과의 영귀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하서집'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백련초해' 등이 있다. 하서 김인후는 소쇄처사 양산보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양씨가승집인 '소쇄원사실'의 기록에 따르면 "신재 최산두가 화순 동복 적벽에서 머물고 있을 때에 고향 장성에서 학문을 배우러 나아갔는데, 이때 하서는 반드시 소쇄원에서 쉬어갔다고 한다. 또한 양산보와 도의지교를 맺어 자식들을 서로 혼인시켰는가 하면 소쇄원에 이르면 달이 넘도록 갈 것을 잊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산두는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하서가 18세에 그를 만났다. 최산두가 살고 있는 동복에 가기 위해서는 소쇄원 인근을 통해 가야 했는데, 하서는 양산보를 잊지않고 반드시 소쇄원을 오며가며 들렸던 것이다. 결국 둘은 사돈 관계가 되어 도의와 우정을 과시하였다. 따라서 16세기 당시 소쇄원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은 주인인 양산보였겠지만, 소쇄원을 시로 표현하여 나타내 보여준 사람은 바로 하서 김인후였다. 소쇄원과 관련된 시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작품은 바로 '소쇄원 48영'이다.

 

 

소쇄원/瀟灑園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에 소재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원림이다. 1981년 국가 사적 304호로 지정된 한국 민간 정원의 원형을 간진한 곳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순응,도가적 삶을 산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서 경관의 아름다움이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 문화유산의 보배이다. 소쇄원을 만든 사람은 양산보라는 사람으로 1503년에 태어나 1557년 생을 마감한 이다. 15살에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는데 스승이 바른 정치를 구현하다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되어 화순 능주에서 귀양을 살다 사약을 받고 죽게되자 17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둔, 처사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이는 선비가 불행하게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도를 마음에 담아둘 뿐 펼치지 못하며 교화는 자신의 집안으로만 그치고 넓혀지지 못한다는 옛적의 말을 볼 때 그로 인해 양산보는 선비의 큰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학문에 힘쓰며, 지역의 선비와 교류하고 나무와 화초를 가꾸고 원림을 조성하며 바른 삶을 살아간 선비의 본보기가 되었던 사람이었음을 알수 있다. 이 소쇄원을 만든 주인 양산보는 후손에게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것이며, 후손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지역이 정유재란때 왜적들의 집중적인 공략을 받았기 때문에 소쇄원의 건물들이 불에 타버리고 주인의 손자인 양천운이 다시 중건하게 된 기록이 남아있으며, 5대손인 양경지에 의해 완전 복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소쇄원은 은둔을 위한 정자이지만 그의 곧은 뜻을 알게된 사림들은 소쇄원을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주인과 교류를 하게 됨으로서 열린 공간으로 호남 사림의 명소가 된 것이다. 소쇄원 주인과 교류하였던 인사들의 면모를 보면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었다. 이후 소쇄원은 양산보의 유훈대로 후손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15대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