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주~가욕관~돈황~투루판~우루무치~카시 구간 | ||||||||||||||
실크로드란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인 F. 리히트호펜이란 사람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운반된 물품이 주로 비단인 것에 착안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실크로드에는 천산산맥의 북쪽으로 가는 천산북로와 남쪽으로 가는 천산남로,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으로 가는 서역남로가 있다는데, 우리는 천산남로로 카스까지 갔다가 서역남로로 돌아오는 코스를 택했다. 비단이 뭐길래 그 고생을 했을까
난주에 도착하니 전체 가이드 김창묵씨와 난주 가이드 허동식씨가 우리를 맞이한다. 시간이 늦어 부지런히 백탑사(百塔寺)를 보러 갔다. 막 문을 닫으려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해 어두컴컴한 백탑사로 올라갔다. 백탑사 꼭대기에 올라가니 7층 높이의 하얀 탑이 서 있고, 발 아래로는 어두운 황하에 밝은 조명으로 모양 낸 황하대철교가 걸려 있다. 허동식씨는 우리들이 밤에 황하를 보게 되어 흙탕물이 잘 안 보이니 다행이라고 했다.
부지런히 나와 이번에는 황하모친상(黃河母親像)을 보러 갔다. 중국에서는 황하를 어머니로 보고 중국 사람들은 모두 황하의 자식으로 본다는 것이다. 황하모친상은 누런 조명을 받고 누워 있는 여인의 곁에 아기가 엎드려 있었는데,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본 중국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10월14일 맑음. 가욕관. 아침 8시쯤 가욕관역에 내려 인원을 점검하니 4명이 없다. 먼저 나갔나 보다 생각하고 그냥 나가려는데 김 사장이 역무원에게 부탁해 떠나려는 열차를 붙잡고 안으로 들어가니 그때서야 정원식, 임경희, 우정복, 윤영자씨가 짐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마 내리라는 소리를 못 들은 모양이다. 우리는 아찔한 순간을 모면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위진벽화묘(魏晋壁畵墓)를 보러갔다. 겉에서 보기에는 평범한 돌무더기에 불과했으나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내려가니 부부합장묘 안쪽 벽에 온갖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벽돌 하나하나에 소, 멧돼지, 닭 등을 잡는 모습도 있고, 요리하는 모습, 뽕나무의 새를 쫓는 모습 등 일상생활이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었다. 몇 백 년을 지난 그림 같지 않게 선명한 색깔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가욕관성에서 나와 현벽장성(懸壁長城)이라고도 하고, 단벽장성이라고도 하는 만리장성 끝자락을 보러갔다. 갈 길이 머니 조금만 올라갔다가 돌아오라는 것을 30분만에 정상의 성루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니 정말 빠르다며 가이드가 혀를 내둘렀다. 가욕관 관광을 마치고 오후 3시가 넘어 돈황으로 출발했다. 돈황까지는 포장도 안 된 고비사막의 흙먼지 길을 하염없이 달렸다. 무슨 화물차들은 그리도 많은지 이 육중한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가 일어나 10m 앞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실크로드는 옛날에만 물류의 중심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길을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며 9시간 이상 달리려니 엉덩이가 배기고 허리가 뻐개지는 것 같다. 길에는 당연히 화장실도 없어 수시로 노상방뇨를 일삼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 차 타고 가기도 이렇게 힘든데, 이런 길을 몇 달씩이나 낙타 타고 다녔을 옛 상인들을 생각하니 비단이 뭐길래 그 고생을 했을까 싶다. 실크로드는 비단결같이 아름다울 줄 알았더니 아주 사람을 잡는 길이었다. 그래도 가는 도중 이종성님이 고비사막 노래를 불러 피곤에 지친 우리에게 작은 위안이됐다.
10월15일(토) 맑음, 돈황.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날을 새우고 아침 일찍 명사산으로 향했다. 명사산(鳴沙山)이란 모래로 된 산인데, 밟으면 모래의 마찰로 소리가 난다고 한다. 난생 처음 낙타를 타려니 좀 겁이 났지만 남들도 다 타는데 못 타랴 싶어 안장 앞의 손잡이를 잔뜩 부여잡고 낙타 등에 오르니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앞뒤로 까불더니 낙타가 일어섰다. 일단 일어서니 별 어려움 없이 명사산 밑에 도달해 거기서부터는 계단으로 올라갈 사람은 20원을 내고 올라가 썰매로 내려오고, 걸어 올라갈 사람은 모래산을 그냥 올라갔는데 한 발짝 올라가면 두 발짝 미끄러지니 할 수 없이 손가락을 모래에 꽂으며 네 발로 기어 올라갔다. 아직 햇볕을 받지 않은 모래는 어찌나 차가운지 장갑을 끼어도 손가락이 동상에 걸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미끄러지며 고꾸라지며 능선 부근까지 오르니 난생 처음 보는 모래언덕이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월아천에서 낙타를 타고 다시 나와 호텔에 와서 샤워하고는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우정복님이 여권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대장님과 김사장님은 얼굴이 일시에 사색으로 변하고 회원들에게도 먹구름이 내렸다. 명사산에서 내려와 사진을 찾을 때 많은 중국인들과 섞이면서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생각한 대장님은 명사산 관리소에 전화를 하여 한국 여권 주운 사람이 있으면 특별히 사례하겠다고 연락하고, 돈황 박물관을 보러 갔는데 우정복님과 김사장은 둘이서 대사관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리는 우정복님을 보는 회원들은 여기서 아주 이별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
▲ 투르판의 화염산을 낙타로 오르고 있다.
사막 사람들에게는 물 위 세상이 극락세계
돈황 박물관에 도착하여 보는 둥 마는 둥하고는 막고굴(莫高窟)로 향했다. 막고굴은 TV에서 본 적이 있는 수많은 동굴로, 굴마다 부처님과 벽화들로 가득했다. 이 굴들은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스님들이 무사귀환을 빌며 굴을 파고 그 속에 불상을 세웠다고 한다. 4세기에서 13세기까지 근 천 년간 만들어졌으며, 지금은 492개의 굴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벽화에 그려진 극락세계가 물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사막에서 물 때문에 고생하던 사람들이 생각한 극락은 물 위에서 마음껏 물 마시고 물을 물 쓰듯 하며 사는 세상이었나 보다. 특히 17굴에는 대량의 불경과 도경, 비단 그림, 수공예미술품 등 4세기에서 14세기까지의 문화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도굴꾼들이 자기 나라로 반출해 가면서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들어 있었다는데, 프랑스인 페리오가 프랑스로 가져가 지금은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 명사상의 월아천. |
이렇게 불상과 벽화를 보고 있는데 우정복님과 김 사장님이 돌아왔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불구하고 대사관 직원이 다시 나와 임시통행증을 발급해줘 같이 관광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우정복님을 다시 만난 우리들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온 듯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막고굴 관광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한 후 유원역으로 이동해 투루판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오늘은 5성급 호텔에서 따뜻하게 잘 수 있다고 기뻐하며 열차에 올랐다. 열차가 출발한 후 조금 갔는데 대장님이 우정복님 여권을 찾았다고 희색이 만면하여 돌아다니셨다. 어디서 찾았나 했더니 우정복님 트렁크 속에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누구나 이런 해프닝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있다고 하며 덕분에 여권 단속 확실하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마음 편히 자리에 누웠다.
10월16일, 투루판. 아침 5시 반쯤 투루판역에 내린 우리는 머릿수를 몇 번씩 세어본 후 30명이 무사히 내린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식사를 하고는 고창(高昌) 고성으로 이동, 당나귀차를 타고 성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고창고성은 고대 고창국의 성터인데,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13세기경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은 무너진 성벽과 불탑이 겨우 남아 있을 정도였지만,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 그 때의 번성을 짐작케 할 뿐이다. 남아 있는 성벽을 바라보니 이곳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그 때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지금과 같이 생을 고민하면서 서로 사랑하며 살았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지금이라도 그 때의 사람이 벽 뒤에서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난주의 황하 모친상. |
고창고성에서 나와 아스타나 고분을 보러 갔는데,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의 장소’라는 뜻이란다. 여기에는 귀족의 묘, 상인의 묘, 평민의 묘가 있었는데, 평민인 부부 묘에는 부부의 미라가 그대로 남아 있다. 남자는 40대에 폐결핵으로 숨졌고, 여자는 70대에 숨졌다는데, 어떻게 폐결핵이란 것까지 알아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다음은 화염산 북쪽 강 절벽에 있는 천불동으로 갔다. 83개의 동굴이 있었다는데, 현재 57개만 남아 있었다. 동굴 속에는 역시 불상과 벽화들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불교를 우상으로 생각하던 이슬람교도의 진입으로 많이 훼손되고, 근세에 와서는 러시아, 독일, 영국사람 등의 도굴로 많은 불상과 벽화가 해외로 반출되고 대신 사진만 걸어놓은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동굴을 보고 나서 뒤의 타는 듯한 화염산(火焰山)을 보자 대장님이 충동심이 발동하여 가이드에게 1시간만 달라고 했다. 산을 오를 사람은 올라가고 낙타를 탈 사람은 타고 희망대로 하라고 하여 대장님과 정원식님, 이포규님, 안순자님, 나, 임양숙씨 이렇게 여섯 명이 붉은 흙과 모래로 된 화염산으로 기어올랐다.
보기에는 30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첫 번째 봉우리에 오르니 또 봉우리가 나타나고, 저기가 끝인가 하면 또 봉우리가 나타났다. 풀 한 포기 없는 능선을 걸으며 양옆을 바라보니 한쪽은 강이요 한쪽은 빙하가 쓸고 간 듯한 거대한 모래 협곡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길을 가노라니 이 길을 따라가면 이대로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 돈황 막고굴 입구. 근 천년간 만들어졌으며 지금은 492개의 굴이 남아 있다. |
화염산은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현장법사가 지나간 곳인데, 서유기에서 우마왕의 집이기도 했단다. 화염산은 이름 그대로 생긴 것도 불꽃 모양이고, 색깔도 불꽃 색깔이고, 여름에는 55℃까지 올라가는 불의 산이란다. 정상에서 깃발까지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는 다시 내려오는데, 대장님은 오른쪽 모래 계곡으로 쏜살같이 뛰어 내려가시고 여자들은 오던 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다들 달려 내려가고 무릎과 발가락이 시원찮은 나는 제일 뒤에서 천천히 내려오는데 임양숙씨는 내가 걱정이 됐는지 천천히 보조를 맞춰 주었다.
화염산에서 내려와 교하고성(交河古城)으로 향했다. 교하고성은 두 개의 하천이 교차하는 곳에 있었다. 2세기에서 14세기까지 번성했다가 멸망한 교하국의 성이란다. 교하고성은 두 하천 사이로 치솟은 30m 벼랑을 위에서 아래로 파들어가며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벽에는 지층이 그대로 남아 있고, 벽돌로 쌓은 고창고성처럼 허물어지지 않아 많은 건축물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번성했던 수많은 나라들이 이토록 폐허로 변했는데, 중국 귀퉁이에 코딱지만 하게 붙어 있는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고 수천 년 동안 살아남은 것은 생각할수록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인생무상, 나라무상이란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 가욕관의 `찬하웅광` 앞. |
고성을 돌아 다시 나오는데 늙은 할아버지와 어린아이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카메라맨들이 사진을 찍기에 웬 일인가 했더니 영화촬영 중이란다. 무슨 영화인지 몰라도 나중에 혹시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꼭 봤으면 좋겠다.
교하고성에서 나와 카레즈(Karez)를 보러갔다. 카레즈는 천산산맥의 빙하 녹은 물을 끌어들여 만든 수로다. 땅 밑에 수로를 만들고 거기까지 우물을 파서 나무도 심고 식수로도 활용하게 되어 있었다. 카레즈에 이어 찾은 소공탑(蘇公塔)은 신강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했다. 회교사원 탑이었는데 여자들은 사원에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조금 나아져서 벽쪽에 있는 방 같은 곳에서 예배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제 날이 어두워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야 관광을 끝내고 밥을 주는 것이 우리 대장님의 철칙이라면 철칙이다. 밥은 굶어도 볼 것 안 보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니 덕분에 우리는 구경 하나는 확실하게 한다. 저녁식사 때 본 위구르 민속 쇼는 규모는 작았지만 정감이 가는 쇼였고, 끝판에는 박남철님, 이인섭님, 김영자님, 장계희씨까지 끌어내어 한바탕 몰아쳤다. 쇼 뒤를 이은 노래자랑에는 일중의 명가수가 총출동했다. 이순정님을 시작으로 김숙옥, 윤영자, 이정자님 등이 나와 노래했고, 이정자님이 노래할 때는 남편 되는 이인섭님이 같이 나와 덩실덩실 춤까지 추어 웃음바다가 됐다. 보통은 부창부수(夫唱婦隨)인데, 이분들은 婦唱夫隨였다. 하여튼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팀이다.
새벽별 보기 운동으로 시작되는 답사여행
▲ 투르판의 화염산 낙타투어. 절벽을 이룬 북쪽 강기슭(천불동)에도 불상과 벽화가 있는 동굴들이 있다. |
10월17일, 우루무치. 아침에 일어나니 이 날도 양숙씨가 토마토 주스를 마시라고 준다. 매일 주스에 과자에 다시마에 대추에 해바라기씨에 껌까지 얻어먹으니 미안스럽기 그지없다. 내가 부실한 줄 알고 대장님이 항상 짭짤한 룸메이트를 짝지어주시니 해외만 나가면 호강이다. 난생 처음 오만 가지 음식이 다 들어오니 내 위장이 엄청 감동 먹었을 거다.
아직 먼동도 트지 않은 깜깜한 새벽에 아침식사를 하러 옆 건물로 가는데 오리온좌가 떠 있었다. 대장님에게 저 사각형의 별 속에 삼태성이 나란히 있는 것이 오리온자리라고 일러드렸더니 오리온 말만 들었지 처음 알았다고 기뻐하신다. 중학교 과학선생을 32년 했더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뻑하면 나서게 된다.
아침식사를 하는데 곳곳에서 어젯밤 11시 반이나 되어 마사지 받으라고 전화 와서 잠들을 못 잤다고 아우성이다. 가만히 들어보니 남자들이 있는 방에만 전화가 왔다. 그런데 정원식님 방에도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아마 정원식이 남자인 줄 알았나 보다. 그리고 안순자님 방에는 남자가 있는데도 전화가 안 왔다는 것이다. 남편 이름이 최영주라서 여자인 줄 안 모양이다. 하여튼 이름 하나는 잘 지어야겠다.
이 날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우루무치로 출발했다. 우루무치는 몽고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이란다. 가는 길에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풍력발전소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바람이 약해 풍차가 돌지 않았다.
우루무치 조금 못 가서 들른 남산목장에서는 말을 탔다. 옥룡설산이나 천호산의 조랑말은 작아서 겁이 안 났는데, 여기 말들은 다 컸다. 그런데 어떤 아줌마가 자기 말을 타라고 하기에 따라가 보니 백말이었다. 백말을 타고 보니 백마 탄 기사가 된 듯 기분이 우쭐우쭐했다. 생각할수록 이현숙 정말 출세했다. 처음에는 45분을 태워준다고 하더니 타는 시늉만 내고 20분만에 내리라고 한다. 김창묵씨가 항의하여 더 탈 사람은 다른 쪽으로 더 돌았는데 우리가 말고삐를 가이드 앞에 놓으면 고삐 임자에게 돈을 주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곳 아줌마들이 고삐를 마구 갖다 놓는 바람에 인원이 30명인데 고삐는 40개가 됐다. 서로 아귀다툼을 하는데 정말 치열한 생존경쟁을 실감케 했다.
▲ 천불동 낙타투어의 주인공 쌍봉낙타. |
우루무치에 도착해 홍산(紅山)공원에 올라갔다. 정상에 빨간 벽돌로 된 탑이 있었다. 진룡탑(鎭龍塔)이다. 옛날 이 지방에 홍수가 자주 나서 피해가 컸는데, 한 관리가 낮잠을 자던 중 꾼 꿈에서 도사가 나타나 홍수가 나는 것은 용의 조화이니 홍산과 그 옆의 야마리크산 사이에 탑을 세워 용을 진정시키면 홍수를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이 탑을 세웠더니 그 후로 비가 잘 안 온다고 한다.
홍산공원에서 나와 천산 천지(天山 天池)를 보러갔다. 천지는 백두산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도 천지가 있는 모양이다. 원래는 천지 밑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요즘은 관광객이 많지 않아 움직이지 않는다 하여 하이브리드카를 타고 올라갔다.
천지에 도달하니 맑고 푸른 물 위에 만년설을 인 봉우리들이 비쳐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여기서 유람선을 타고 천지를 한 바퀴 돌았는데 호 선생은 여기 찍으랴 저기 찍으랴 이 사람 찍어주랴 저 사람 찍어주랴 정신이 없다. 카메라도 좋고 ‘찍사’도 좋아 사진이 기막히게 나오니 너도나도 찍어달라고 야단이다. 한 번 여행 갔다 오면 사진 값만 100만 원 넘게 나온다는데, 매번 공짜로 주니 언제나 이 신세를 다 갚으려나 모르겠다. 그저 하시는 사업이 잘 되어 앞으로도 계속 같이 다닐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천지에 정신이 팔려 있다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려 했다. 위구르 박물관이 문 닫을지도 모른다고 허둥지둥 내려와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는데 하도 차가 막혀 꼼짝하지 않는다. 걷는 게 더 빠르겠다며 버스에서 내려 부지런히 걸어가니 막 문을 닫으려고 한다. 사정해서 들어가니 불까지 다 끄고 문도 잠갔다가 다시 불을 켜고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박물관 속에는 여러 민족의 고유의상, 그림, 생활용품들이 있었는데, 다리미는 옛날 우리나라에서 숯을 넣어 쓰던 것 하고 똑같이 생겼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아기 요람이었는데, 요람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기들 오줌 받아내는 구멍이란다. 누워 있는 아기 고추에 ㄱ자 형태의 나무대롱을 끼워 밑으로 내려가게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저귀를 채우는 것보다 더 위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볼 것 다 보고 저녁에는 또 민속쇼를 보며 식사하는 곳에 갔는데, 안순자님 내외가 거금 300달러를 내어 한 턱 쐈다. 쇼도 화려하고 음식도 푸짐했는데 신나게 먹다보니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화장실 표시가 없어 일하는 아줌마에게 토일릿이라고 해도 모르고 더블유씨라고 해도 몰라서 할 수 없이 쉬이~ 했더니 단박 알아듣고 저쪽으로 가라고 가르쳐준다. 하여간 어줍잖은 영어보다는 바디랭귀지가 최고다.
10월18일, 카시. 새벽같이 일어나 공항으로 이동해 카시로 향했다. 카시의 원래 이름은 카슈가르. ‘옥석 같은 땅’이란다. 이번 여행은 연일 새벽별 보기 운동이었다. 별 보고 출발하여 별 보고 호텔에 들어오니 북한의 새벽별 보기 운동보다 더 하드 트레이닝이다. 인도에서 귀국하던 당나라 현장법사도 이곳에 들렀는데, 그 때도 꽃과 과일이 풍성했다고 한다.
▲ 우루무치 민속쇼에서 노래를 부르는 현지인. |
카시공항에 내리니 오전 8시 반이 되었는데도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중국은 전체가 북경을 표준시로 잡기 때문이란다. 대장님이 주신 지도를 보니 카시가 북위 39도쯤 됐다. 우리나라도 38도선 부근이니 위도는 비슷한데 북경과의 경도차 때문인 것 같다. 북경은 동경 약 115도이고, 카시는 동경 75도밖에 안 되니 40도 차이면 1시간에 지구가 15도 자전하니까 약 2.7시간이 늦는 셈이다. 그러니 신강자치구 시간으로는 6시도 안 된 것이다.
공항에서 곧 바로 아이티카 청진사(淸眞寺·이슬람 신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보러갔다. 청진사는 신강자치구에서 가장 큰 청진사라고 했는데, 들어갈 때는 여자 남자가 팔짱을 낀다거나 짧은 팔 옷을 입으면 안 된다고 했다. 하기는 이슬람교도들이 대부분이라 길거리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뒤집어쓰고 다니는 여자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얼굴까지 시커먼 머플러를 썼는데 어떻게 앞이 보이는지 잘도 걸어 다녔다.
신을 벗고 청진사 안에 들어가니 예배시간이 아니어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벽에는 현재 시각을 알리는 시계와 예배시간을 알리는 6개 시계가 걸려 있고, 예배를 주관하는 아홍(위구르족 이슬람 승려)이 앉는 의자와 큰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이 카펫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물건이라 했다.
사원에서 나와 화장실에 가려고 ‘WC’라고 쓴 곳으로 갔더니 한 남자가 못 들어가게 한다. 여자 화장실은 아예 없고 남자 화장실만 있는데 그것도 돈을 내야한다기에 대장님도 그냥 돌아오셨다. 속으로 ‘에라이~, 여기 아니면 화장실 없냐?’ 하며 돌아나왔다. 하여튼 회교국에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청진사에서 나와 위구르 시장 거리를 구경했다. 푸줏간에, 대장간에, 과일가게 등등 우리나라 옛날 장터 같았다. 포도가 어찌나 싼지 1kg에 2원(우리 돈으로 280원)이었다. 우리는 포도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 카시의 향비묘. 북경서 자살한 시신을 3년 반에 걸쳐 운구해 봉안한 묘다.
베이징서 자살한 향비의 시신 3년 반 걸려 운구
시장 구경을 마치고 향비(香妃)묘로 향했다. 향비는 카시 여자로서, 이 지역 귀족의 딸이었다고 한다. 청나라 건륭제 때 한 장군이 카시를 점령하면서 황제에게 선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에 향비는 정혼한 사람이 있어 항상 가슴에 칼을 품고 황제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았는데, 황태후가 그녀를 불러 소원을 묻자 죽는 것뿐이라고 말하자 별실에서 자살케 했다고 한다. 그녀의 몸에서는 항상 향긋한 냄새가 나서 향비라고 했다는데, 그녀의 죽음을 안 카시 사람 124명이 상여를 메고 3년 반이나 걸려 베이징에서 시신을 운구한 다음 이곳에 묻어주었다는 것이다.
향비에 대한 설명을 듣고 향비묘로 들어가니 마치 인도의 타지마할을 보는 듯했다. 생긴 모양도 비슷하고 왕비묘라는 점에서도 그랬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다 똑 같은데, 어떤 사람은 쓰레기처럼 땅에 묻히고 어떤 사람은 온갖 장식으로 뒤덮인 건물 속에서 수백 년이 지나도록 뭇 세인의 애도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참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향비묘에서 나와 1인당 30위엔씩 내고 고택민가를 보러갔다. 2000년 전부터 위구르인들이 거주하며 여러 가지 수공예품을 만들었다는데, 현재의 집들은 400~500년 된 집이라고 했다. 이 집 저 집 들어가 봤는데 마침 아기 젖 먹이는 여자도 있고 대문에 걸터앉아 모자를 만드는 여자도 있었다. 한 집에 들어가니 어제 박물관에서 본 것과 같은 요람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기도 있었다. 어디나 사람 사는 건 다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이렇게 쳐들어가 구경하는 것이 고요한 수면에 돌을 던지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 투르판의 고창고성. 13세기 이슬람국의 침입을 받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고택민가에서 나와 찾은 바자르는 우리나라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과 흡사했다. 그런데 한 아홍이 흰 터번을 두르고 어떤 여자를 끈으로 묶어 끌고 다니며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곤 했다. 여자가 무슨 잘못을 한 건지 반항도 안 하고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회원들은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여러 가지를 샀는데 다들 깎는 데 도사가 됐다. 180원인가 하는 스카프를 30원에 달라고 떼를 쓰니 안 된다고 그냥 가라고 마구 손짓을 한다. 그냥 가려고 하니 “last price! last price!” 하며 35원 내란다. 그래도 안 사고 가는 시늉을 하니 붙잡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은 안 되나 보다고 다시 가서 아홉 개씩 열 개씩 사가지고 버스로 돌아왔다. 기막힌 신경전인데, 신경전에서 지면 바가지를 쓰게 되어 있다.
바자르에서 나와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저녁 먹고 나오는데 어떤 중국 여자가 우리들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다. ‘KOREA’라고 했더니 반색을 하며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통 모르겠다. 가이드 김창묵씨에게 물으니 자기가 TV 드라마 대장금을 보는데 너무 재미있고 한국 사람들이 어른을 공경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도 좋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드라마가 한국의 위상을 엄청 높인다는 생각이 들고 공해 없는 이런 사업으로 외화를 많이 벌어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텔로 돌아와 오늘이 남편 생일이란 생각이 들어 전화를 하려니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비즈니스룸에 들어가 무조건 “telephone” 했더니 전화기를 가리키며 쓰라고 한다. 남편에게 아침에 뭐 좀 드셨냐고 했더니 아들 며느리가 아침밥을 해 와서 잘 얻어먹었단다. 그 소리를 들으니 조금 덜 미안했다. 남편 생일도 안 챙겨주고 뭘 보겠다고 이러고 다니나 하는 생각도 들고, 갈수록 자연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내 모습이 갈수록 추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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