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동부지방으로의 여행은 특별하다. 이 지방을 여행한다면 반드시 들러보아야 할 곳이 바로 반 호수(Van Lake)이다. 물론 동부지방에는 아름다운 카츠카르산과 아라라트산, 쿠르드족 마을 등 가볼 만한 곳들이 많지만, 무엇보다 많은 여행자들은 아직까지 베일 속에 가려있는 전설의 반 호수를 보기 위해 먼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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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토스 산을 배경으로 반 호수 위에 유유히 떠 있는 아르메니아교 수도원. |
오랫동안 터키는 많은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대부분의 여행지는 이스탄불을 비롯한 서부에 편중되어 있다. 약간의 모험심과 호기심에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고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싶다면 터키 동부로 향해 보자.
터키 동부는 지형적으로 황량한 광야와 같은 사막성 지형도 펼쳐져 있고, 고봉준령의 험준한 산들도 늘어서 있다. 연중 관광객들로 숨쉴 틈 없이 몰려드는 서부 지중해 연안과는 사뭇 다르게 넉넉함이 있다.
반 호수는 기원전 8세기 우라르투 제국 때부터 침략과 전쟁의 피로 물든 역사의 산증인이자 이 지역을 오갔던 여러 제국들이 신성시했던 영지이기도 하다. 오늘날 빛바랜 역사의 증거들은 거의 증발해 버리고 말았지만, 호수의 푸른 끼 도는 물결 속에는 변함없이 은빛 미소가 햇살을 머금고 빛나고 있다.
멀리서 바라본 아라라트 산 전경
반 호수 주변을 구경하기 위해 먼저 반(Van)이라는 같은 이름의 도시로 향해야 했다. 야간버스를 타고 반에 도착한 첫날은 오전부터 장대비가 주룩주룩 쏟아져 내렸다. 예년 같았으면 벌써 눈이 내렸을 터인데, 이상기온이라며 이곳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마디씩 해댔다. 그렇게 첫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낙심한 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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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 한 사내가 반 호수에서 잡은 담수어를 도로 주변에서 행인들을 상대로 팔고 있다. (下) 반 호수 주변의 쌍둥이 모스크. |
다음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 호텔 창밖을 내다보니 햇살에 눈부셨다. 때때로 여행은 우리의 고정 관념을 깨고 기쁜 선물을 들고 다가오기 마련이다. 어제 쏟아진 폭우는 화창한 오늘 날씨에 대한 축복이었다. 오늘 아침 일찍 만나기로 한 가이드와 차를 몰고 반 호수로 향했다. 먼저 도심 근처의 반 칼레시(Van Castle)의 중세 성곽에 올라 아름다운 호수의 자태를 내려다보았다. 아작아작 풀을 씹으며 인근 목초지를 점령하고 있는 양떼가 점점이 얼룩져 보였다. 푸른 물감을 잔뜩 풀어놓은 듯한 호수를 뒤로하고 목가적인 풍경이 잘 어우러진다.
호수 반대편으로 저 멀리 아라라트산까지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아라라트산은 성서에서도 언급한 영산(靈山)으로, 구약시대 온 세상이 홍수로 뒤덮였을 때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다는 전설의 산이다. 이 산은 오늘날에도 마치 노아의 방주가 금세라도 떠내려 올 것 같은 기세로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해발 5,165m의 눈 덮인 아라라트산을 이곳에서 선명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커다란 행운이었다. 하도 높아 산꼭대기는 연중 내내 구름에 가려있을 수밖에 없다는 그 산을 운 좋게 멀리서 전경을 감상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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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左) 소박한 터키인들의 삶의 체취를 느끼게 하는 목자와 양무리. (右) 나귀를 타고 행차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담긴 벽화가 악다마르 섬의 수도원 내부에 그려져 있다. |
반 호수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도심에서 44km 떨어져 있는 신비의 섬 악다마르(Akdamar)다. 그 섬을 찾아가기 위해 눈이 시리도록 푸른 호수와 새하얀 눈밭을 끼고 도는 포장도로를 따라 쉴 새 없이 달렸다. 잘 닦여진 포장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기분도 좋았거니와 주변에 펼쳐지는 백만 불짜리 풍광은 예술적 가치를 지닐 정도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어제 내린 비로 산 위에는 수북이 눈이 쌓여 은빛 찬란한 설백(雪白)의 미학을 감상할 수 있었다.
호숫가 주변에 펼쳐진 목가적 풍경
반 호수 서쪽과 동쪽은 거대한 아르토스(Artos)산과 넴루트(Nemrut)산이 어깨동무하며 호수를 사방으로 감싸고 있다. 그렇게 길게 이어진 산등성이가 새하얀 얼굴을 띠고 새파란 호수를 한 아름 안고 있으니 대낮인데도 마치 호러 팬터지에나 나올 법한 차갑고 으스스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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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반 호수 주변의 시골 주민들의 상당수는 목축업에 종사하는데, 이곳 아이들은 양치기 목자인 가족들을 따라서 어릴 때부터 양치는 법을 배우게 된다. 2.중소도시 반의 재래시장에 가보면 쇼핑할만한 다양한 아이템들이 가득하다. 사진은 터키의 화려한 문양이 돋보이는 은세공 찻잔 세트. 3.악다마르 섬의 수도원 건물 외벽은 성서의 이야기가 담긴 부조물들로 장식되어 있다. |
대지에서는 눈꽃 향기와 더불어 봄을 재촉하는 듯한 향긋한 흙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시큼한 냄새가 나는 싯누런 거름더미들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보는 이들의 마음속에서도 어느새 정겨운 시골 냄새가 풍겨져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리하고 주름투성이 얼굴을 한 노인이 손자뻘로 보이는, 짧고 푸른 깃을 세운 허름한 상의를 입은 목동아이와 함께 수십 마리의 양떼를 몰고 도로 위를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 그들은 우리 일행과 눈이 마주치자 당황해 하다가 다시 아무런 감상 없이 우리 일행을 한 번 슬쩍 바라보고는 바삐 갈 길을 재촉했다. 아마도 낯선 이방인들의 출현에 익숙해 있지 않음이리라. 그들의 얼굴에는 소박함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새겨져 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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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도시 외곽에 반 칼레시(Van Castle)의 잔해가 언덕 위에 남아있다. 이 언덕 위에 오르면 멀리 눈 덮인 아라라트 산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
얼마쯤 가다 잠시 차에서 내려 호숫가 경치를 감상하던 중 도로 가에 몇몇 사람들이 둘러서서 뭔가를 들여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다가가서 보니 두어 명의 청년들이 저 밑 호숫가에 놓인 보트에서 생선이 가득 든 상자를 날라다가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흥정을 벌이며 팔고 있었다. 물고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먹음직스러울 정도로 햇살에 빛깔이 눈부셨고, 팔딱거림이 거셀 정도로 싱싱해 보였다.
신비의 섬 악다마르
반 도심을 떠난 지 약 3시간 정도 지나자 숨막히는 음모가 숨겨있을 듯한 비밀의 섬 악다마르 섬이 드디어 시야에 들어왔다. 호수 위에 유유자적 떠 있는 악다마르 섬의 모습은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모습이다. 악다마르로 가기 위해서는 작은 보트를 타고 가야했는데, 일행이 둘뿐이어서 돈을 좀 더 지불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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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산이 분출하면서 생성된 반 호수는 미네랄이 풍부하고 알카리성이어서 비누 없이도 깨끗한 빨래가 가능하다. |
대신 선장은 우리 일행이 보트에 올라타기 전에 차를 한 잔 권했다. ‘차이’라고 불리는 진홍빛의 맑은 홍차는 이곳 터키에서 상하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 관계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한다. 모르던 사람들도 이 차이를 나누어 마시면서 금세 친해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마시는 한 잔의 차 속에는 기쁨과 소망의 향내가 진하게 난다.
보트 위에 오르자 엔진이 가열될 것 마냥 엄청난 진동과 굉음을 낸다. 달리는 보트 사이로 차디찬 물살이 기포처럼 터져 나갔다. 물결은 마치 감미로운 율동감과 정열적인 멜로디가 느껴지는 탱고의 선율처럼 파란 도화지 속에서 마음껏 신나게 몸부림쳤다. 호수 위로 떠가는 보트 위에서 바라보는 섬 주변의 풍광은 또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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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호수로 떠나는 여행길의 베이스가 되는 중소 도시 반(Van)의 중심가. |
이 작은 섬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비록 인적 없는 무인도였지만 곳곳에는 잔설 위의 매화 향기처럼 영겁의 내음이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다. 먼저 이 섬의 유일한 건축물인 작은 수도원을 향해 발을 옮겼다. 수도원 외부 벽에는 성서의 이야기를 묘사한 양각화들이 새겨져 있다. 얼핏 보아도 알만한 다윗과 골리앗, 선지자 다니엘, 아브라함과 이삭 등 다양한 성경 이야기들이 그대로 벽면에 나타나 있다.
수도원 앞에는 친절하게도 터키어와 영문으로 간략한 설명을 적어 놓은 안내판이 서있었다. 수도원 내부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니 내벽을 화려하게 수놓았을 듯한 성화들은 모두 훼손되어 있었다. 고귀한 구도자의 영적 생활은 간 데 없고, 단지 영혼을 쓰다듬는 감성적인 낮은 울림만이 은은하게 풍겨나와 코끝을 간질였다. 이곳 역시 외국 관광객들이 찾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터키 내의 다른 기독교 관련 유적지가 그러하듯 거의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는 듯하다.
섬에서 바라보는 호숫가 주변은 그야말로 대자연의 위용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행의 묘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지금까지 내가 기대하고 있던 것이 기대이상으로 훨씬 다양하고 풍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의 감격 말이다. 구석진 바위틈에 앉아 포근한 햇살을 맞으며 시원한 산공기에 취해 주체할 수 없는 맑은 호수 내음에 취해 한참을 혼잣말로 자연과 속삭인다.
/글·사진 김후영 포토저널리스트
가는 길
터키행 직항편은 터키항공(아시아나항공과 코드쉐어)이 있다. 유럽 항공사를 이용할 경우 유럽의 주요 도시들을 경유해 이스탄불로 들어갈 수 있다. 반 호수 여행의 베이스가 되는 작은 도시 반(Van)은 이스탄불과 앙카라에서 매일 두 편의 비행기가 운항한다(편도 요금 각 120달러, 90달러). 버스로는 이스탄불과 앙카라에서 각 30시간, 22시간 소요된다(편도 요금 각각 33달러, 25달러).
반 도심에서 악다마르섬까지 가기 위해서는 호텔이나 관광안내소에서 투어(50달러 정도)를 신청하거나 택시(40달러 정도)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반 도심에서 작은 미니버스(바자르 옆 베쉬욜 근처의 작은 버스정류장)를 타고 게바쉬(Gebash)라는 호숫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까지 가서 다시 악다마르섬으로 가는 보트 선착장까지 8km 정도 걸어가야 한다. 게바쉬에서 보트 선착장 방면으로 지나가는 차량을 얻어 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호텔
숙소는 반 도심에 마련하는 것이 좋다. 반 도심에서 악다마르섬까지는 당일투어가 가능하다. 가장 최근 생긴 악다마르 오텔리(Akdamar Oteli)는 TV와 욕조를 갖춘 아늑하고 현대적인 객실을 제공한다(주소 Kazum Karabekir Caddesi, 전화 214-9923, 싱글룸, 더블룸 각 50달러, 60달러).
쿰후리옛(Cumhuriyet) 거리에 위치한 야쿠트호텔(Hotel Yakut)은 모던한 안락함과 함께 도심 한복판에 있어 여행자들에게 교통 편의를 제공한다(주소 Posta Caddesi 8, 전화 214-2832, 싱글룸, 더블룸 각 30달러, 50달러).
이 도시의 베스트 호텔인 별 4개짜리의 부육우라르투 오텔리(Buyuk Urartu Oteli)는 도심 안에 위치하며 국립병원 맞은편에 있다. 터키 스타일의 독특한 인테리어가 가미된 모든 객실에는 TV와 욕조가 마련되어 있다(주소 Cumhuriyet Caddesi 60, 전화 212-0660, 싱글룸, 더블룸 각 70달러, 100달러).
음식 및 레스토랑
터키인들이 즐겨먹는 케밥이나 피데(터키식 피자) 등이 여행자들에게 인기 많다. 터키인들은 양고기, 소고기, 닭고기 등을 즐겨먹는다. 옥수수가루로 만든 터키식 수프인 초르바는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다. 터키인들을 상대로 하는 일반 식당의 값은 대체로 3~5달러 정도이다. 중상급 이상의 호텔의 경우 호텔 레스토랑에 외국 여행자들을 위한 간단한 양식을 마련해 놓는다.
24시간 영업하는 술찬 소프라시(Sultan Sofrasi·Cumhuriyet Caddesi 30)는 터키식 로스트 치킨으로 유명한 곳이다. 학생 손님들이 즐겨 찾는 곳이지만, 수프와 케밥, 스튜 등의 정식 코스를 5달러 정도에 즐길 수 있는 저렴한 곳이다.
반 호수를 감상하면서 식사를 즐기려면 도심을 벗어나 게바쉬로 이어지는 간선도로 주변의 레스토랑 중 한 곳을 찾아 들리면 좋다. 악다마르 보트 선착장 맞은편에 위치한 악다마르식당(Akdamar Restaurant·전화 432-622-2525)은 멋진 호수의 전망을 즐기면서 토마토, 고추를 고기와 함께 듬뿍 넣어 만든 미트 스튜를 라이스, 샐러드와 함께 5달러 정도에 즐길 수 있다.
쇼핑
인구 40만의 작은 도시 반에서 외국 여행자들을 만족시킬 만한 큰 쇼핑몰이나 고급 상점을 찾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다. 하지만 도심 미니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바자르(재래시장)에는 식료품, 과일, 야채 외에도 외국 여행자들의 눈길을 끌만한 전통 민예품을 파는 상점들이 몇 군데 눈에 띈다. 번화가인 쿰후리옛 거리에서도 터키 양탄자, 직물 공예품들을 파는 작은 가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치안
여행자가 지녀야 할 일반적인 주의사항을 항상 인지한다면 터키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나라다. 특히 이스탄불과 같은 대도시나 혼잡한 여행지에서와는 달리 반 호수 주변에서는 관광객을 상대로 한 범죄율은 매우 낮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