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완)

호남정맥(3차)운암삼거리~가는정이~성옥산~왕자산~구절재~고당산~개운치

울산 금수강산 2013. 6. 16. 08:54

 

1. 언제 : 2013. 4.11.10 (일요일)

2.어디서:운암삼거리~여우치~가는정이~성옥산~소리기재~왕자산~구절재~고당산~561봉~개운치

3.날씨: 비온후 맑음 바람많음

4. 왜:종주

5. 누구랑:금수강산,산딸기님

 

 

 

전봉준 [全琫準, 1855~1895] 

 

초명 명숙(明叔), 별명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여 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임명되고 은거 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여 국정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섬의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是正)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케 했으나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 이윽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궐기를 호소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溝)·정읍(井邑)·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봉기,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진멸권귀(盡滅權貴)·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 전주를 향해 진격 중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계속 정읍·고창·무장 등을 장악,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인천에 상륙하고 동시에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군(日軍)도 입국하여 국가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의 응징, 노비의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시정개혁(施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일본이 청일전쟁에서의 우세를 이용하여 침략행위를 노골화하자 이에 격분, 재봉기하였다. 전봉준은 남도접주(南道接主)로 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의 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다. 한때는 중부·남부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규모가 확대되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였으며 공주(公州)에서 일본군과의 대격전 끝에 대패(大敗)하고 10월 금구싸움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 피신, 동지 손화중(孫化仲)·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지방민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동지들과 함께 1895년 3월 사형당하였다.

구절재/九節峙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와 산내면 능교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해발고도 230m의 고개로, 국도 30번이 지나간다.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와 산내면 능교리 사이에 있다. 호남정맥이라 불리는 산줄기의 맥이 이어지는 곳으로, 구절재(구절치)를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왕자산~소리개재~성옥산~여우치~묵방산이, 남쪽으로 사적골재~노적봉~굴재~고당산~개운치가 이어져 있다. 구절재 고갯길은 1676년(숙종 2) 현재의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에서 태어난 모은 박잉걸(朴仍傑)이 처음 닦았다고 하는데 고갯마루에 박잉걸의 공덕을 기리는 치도불망비(治道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구절재 아래에는 섬진강수력발전소(칠보수력발전소)가 있다.

 

석탄사/石灘寺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반곡리 사자산(獅子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심우회에 소속된 사찰이다. 신라 선덕여왕(재위:632∼647) 때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하나 당시 이 지역은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신빙성은 떨어진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의상이 이곳에 절을 짓자 한 제자가 ‘왜 이렇게 한적한 곳에 절을 지어 고생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의상은 ‘학승이나 선승은 배가 고파야 공부가 잘 되는 법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597년(조선 선조 30)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1750년(영조 26) 백암리에 살던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이 중건했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뒤에는 동학군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으나 이 때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그 뒤 가산(迦山) 김수곤(金水坤:1873∼1950)이 중건했고, 1950년 6·25전쟁으로 다시 불에 탄 것을 1973년 탄월(灘月) 조병준(趙竝晙)이 중건을 추진하였다. 1986년에 이르러 법당과 종각을 세워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대웅전과 종각·요사·염불전·삼성각 등의 건물이 있으며, 유물로는 범종과 오층석탑·약사불상·십일면관세음보살상 등이 전한다. 대웅전을 등지고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 위를 무제등(舞際嶝)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가뭄이 들었을 때 태인읍의 현감이 직접 주관하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묵방산

[ 墨方山 ]

높이 538m로,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과 임실군 운암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묵방산은 호남정맥의 산줄기인데 북쪽으로는 오봉산~초당골~경각산이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성옥산~왕자산~구절재~고당산이 이어진다.

국사봉·오봉산·나래산·회문산 등과 함께 옥정호(玉井湖)라고도 불리는 갈담저수지(만수면적 26.5㎢)를 둘러싸고 있다. 산으로 오르는 능선 곳곳에서 옥정호가 내려다보이지만, 정상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전망이 좋지 않은 편이다.

전라북도 남부를 흐르는 동진강(東津江, 44.7km)이 바로 묵방산 남쪽 기슭에서 발원한다고 알려져 있다. 산 아래 여우치(如牛峙, 284m)라는 고개에는 여우치마을이 형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