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산

파키스탄 트리피카

울산 금수강산 2007. 1. 27. 18:33

▲ C2(5,800m)에서 본 드리피카 정상. 커니스를 형성한 설릉은 밟으면 금방 무너질 정도로 상태가 불량했다. 결국 드리피카 전면과 비슷한 수직에 가까운 후면 설벽을 횡단하면서 올라야 했다.

 “우두두둑….”      

앞에 서 있던 김형주 선배가 갑자기 멀어진다. 난 추락하고 있었다. 머리가 밑으로 되어 떨어졌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혼합등반지대였으므로 바위가 많았다. 곧 기다리던 커다란 충격이 허리에 왔다. 너무 아팠다. 눈을 뜨고 있었던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다. 빠르게 다가오는 저 바위에 또 부딪히겠구나. 두번째는 참을 만했다. 여기서 절대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60m 로프가 팽팽해지며 나의 비명소리도 함께 멈추었다.

해발 3,060m의 후세 마을에서 시작된 드리피카(Drifika·6,447m) 캐러밴은 곤도고로 피크(5,650m)로 가는 길목인 사이초(Sayecho·3,270m)를 거쳐 차라쿠사 빙하로 들어선다. 초골리사(Chogorisa·7,665m)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 안캄(Ankam·4,025m), 그리고 빙하 위를 한나절 동안이나 걸은 후에야 최종 목적지인 K7 BC(4,300m)에 도착했다.

▲ 베이스캠프 가는 길. 오른쪽서부터 하지피크(Hajji Peak·5,985m, 2003년 미국의 스티브 하우스가 솔로 초등), 파르밧피크(Parhat Peak), 파티피크(Fathi Peak·5,600m, 1998년 이탈리아팀의 루카 마스페스가 900m의 북서벽으로 초등).

사이초의 게스트하우스에는 이곳을 지나가는 수많은 산악인들이 방문록에 사인을 해두었는데,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크리스찬 브레나.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스포츠클라이머이며 월드컵대회에서 우승을 한 적이 있다. 작년까지도 대회에 참가했고 함께 저녁을 먹을 정도로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여서 가까운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고 동료의식이 느껴졌다. 산장지기의 말에 의하면 새 루트를 낸다며 초골리사로 한 달 전에 지나갔다고 했다.

‘고산 왕초보’ 벗어나기 위해 먼지 뒤집어쓰며 맹훈련

후세 마을을 떠난 지 3일만인 7월10일 BC에 도착했다. 눈에 보이는 주위의 벽들은 온통 암벽으로 포장되어 있고 하얀 눈들이 곳곳에 붙어 있다. 이미 많은 원정대들이 거쳐간 듯 돌로 쌓은 포터들의 잠자리와 화장실이 있고, 주변 풀밭에는 갖가지 색깔의 꽃들이 조화롭게 피어 있었다. 저 높은 곳에서 흘러내리는 빙하 녹은 물은 깨끗했으나 소름끼치게 차가웠다. 한국에서 진공포장해서 가져간 각종 젓갈과 간고등어를 담가두었다. 20분 거리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독일팀은 2주 전에 도착했고, 1주일간의 적응시간을 가진 후 드리피카에 C1을 설치했으나 방향을 잘못 잡아 첫 시도는 실패했다고 전했다.

BC에서 이틀을 휴식한 후 바로 눈앞에 보이는 암봉인 네이자피크(나세르브락·Nasser Brakk·5,200m)를 고소적응 겸해서 등반하기로 했다. 나세르는 우르두어로 화살이라는 뜻이다. 삼각형 모양이 영락없는 화살처럼 보인다.

▲ C2(5,800m). 뒤로 마셔브룸, 곤도고로, 초골리사가 보인다.

언뜻 침봉 사이의 쿨와르를 금방 올라설 것처럼 보였으나 8시간이나 걸려 오후 2시에 안부 위에 섰다. 총 10마디가 넘는 바위를 올라갈 여유가 없었다. 하늘은 이미 검은 구름으로 가득했고, 리지화를 신은 이종욱 선배는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어 있었다. 할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며 캠 장비와 로프를 바위 밑에 두고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데, 눈이 녹아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김형주, 송석원 선배가 ABC를 구축하고 하산하는 길에 우리가 오르던 쿨와르를 확인, 무전으로 마지막으로 올라오던 이종욱 선배에게 무려 1,000m는 넘어 보인다고 알려왔으나 윤재학(코오롱등산학교 대표강사) 선배와 나는 듣지 못하고 끝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며칠간 비가 내린다는 독일대의 정보에 점심식사에 초대해 많은 얘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리더인 얀(Yann)을 포함해 18~25세의 젊은 클라이머들로 구성된 독일의 청소년오지탐험대는 의사 1명을 포함해 모두 11명이었다. 2년 동안 알프스 등지에서 합동훈련을 마친 그들은 독일산악연맹(DAV)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이곳에 왔다. 그들이 1년 동안 치밀하게 조사한 방대한 분량의 차라코사 밸리의 벽들은 무궁무진했다.

인공위성을 통해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1주일간 예측한 날씨를 받고 있었는데 거의 정확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 팀은 평균나이 50세인 실버팀(?)이었지만 테이프슬링을 기다랗게 엮어서 함께 줄타기도 하고 우노게임(독일식 카드게임)을 즉석에서 배워가며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일주일 동안 내린 비로 축축해진 텐트 안과 침낭은 온통 곰팡이 냄새가 가득했으나 마음만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으로 설렘이 가득했다. 이용대 교장 선생님이 실전강의로 피켈 사용법과 제동법 등을 가르쳐 주신다. 선배강사들이 교대로 맨땅에 엎드리며 몸으로 직접 보여주었고 알피니스트가 되기 위한 왕초보는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열심히 따라했다. 모두들 웃으니 주위에 행복한 기운이 가득 퍼진다.

▲ K6 산군. 왼쪽 봉이 K6(7,281m), 가운데가 P6900, 오른쪽이 카푸라(6,544m)다. 카푸라 밑으로 보이는 빙하 안쪽으로 가면 드리피카가 보인다.
7월20일, 기상예보에 의하면 앞으로 4일 동안 날씨가 좋다고 하니 이제 출발할 때다. ABC(4,800m)에서 C1(5,100m) 가는 길은 서로 엉키고 뒤죽박죽된 혼돈의 대지였다. 그 빙하 위를 넘어서면 암벽지대였고, 그 위엔 커다란 침봉에서 쏟아져내린 바윗덩어리들이 모인 너덜지대였다. 독일대 캠프를 지나 광활한 플라토 위에 텐트 3동을 세웠다. 그제서야 드리피카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였다. 정상은 아주 뾰족한 첨탑이었고, 그 밑으로 시커먼 바위들이 보였다. 목표물을 발견하고나니 꼭 정상에 서야겠다는 마음이 굳어졌다. 내일은 C2(5,800m)까지 가야 되니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정상 직전 15m 직벽에서 60m 추락

 새벽 3시에 일어났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5시가 되고 말았다. 인스턴트 비빔밥을 처음에는 무척 맛있게 먹었는데 몇 번 먹어보니 점점 냄새가 역겹다. 물을 붓고 끓여서 억지로 먹는다. 오전 6시에 출발하니 금세 태양이 얼굴을 디민다. 10시가 넘어서부터 영상 36~37℃의 강렬한 태양과 눈에서 반사되는 열이 몹시 지치게 만든다.

▲ 무명봉을 등진 채 ABC로 향하는 대원들. 앞쪽부터 김형주, 이종욱, 필자.
이종욱 선배는 빌려온 남의 신발이 맞지 않아 이미 복숭아뼈 양쪽이 짓물려 걷기 힘들 정도였다. 말없고 우직한 선배는 고심 끝에 다시 C1으로 내려가신다. 녹은 눈 때문에 허벅지까지 빠졌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견딜 만했다. 내려가는 길은 쉽지만 희망 없는 길이고, 올라가는 길은 비록 힘들지만 내 자신을 이기는 길이다. 무전으로 소식을 들은 김형주 선배가 빠른 걸음으로 올라오신다.

C2 직전, 로프가 필요한 암벽지대 밑에서 앉아 선배를 기다렸다. 5,800m의 C2에 도착하니 전날 출발한 독일대의 텐트 2동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옆에 나란히 우리 텐트가 있어 외롭지 않아 보였다.

김형주 선배가 눈앞에 보이는 봉우리들을 설명해 주신다. 우측 발토로 빙하 방향으로 마셔브룸, 곤도고로피크, 초골리사가 멋진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었고, 그 뒤로 보이는 K2 정상은 하얀 구름에 덮여 있었다. 좌측으로는 아민브락 산군들이 우뚝 솟아 있다. 우리가 올라온 방향으로는 K7의 침봉들이, 바로 앞에는 K6(7,282m), 그리고 카푸라(6,544m)에 걸쳐 있는 설벽들이 눈을 현란하게 한다.

머리가 아파 타이레놀 한 알을 먹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선배가 저녁 먹고 자라고 깨웠으나 모른 척하고 계속 누워 있는데 독일팀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며 걱정하신다. 얼마쯤 지났을까. 멀리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잠을 깼다. 새벽 4시에 출발했던 독일팀이 밤 11시40분이 되어서야 C2에 도착한 것이다. 환한 보름달이 그들의 발길을 안내해 주었고, 20시간의 등반이 피곤하지 않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내려왔다. 행복해 보였다. 미리 끓여둔 차를 주었더니 고마워한다.

▲ C1(5,350m). 드리피카 정상이 흰 구름으로 덮여 있다.

아이스액스 두 자루가 없으면 등반이 불가능하다며 꼭 챙겨가라고 한다. 정상 부근은 혼합지대로 M4급이 된다고 지질학 전공 대학생 크리스토퍼가 말했다. 좋은 날씨는 오늘 하루 뿐, 내일 오후부터 며칠간 흐려진다는 얘기도 곁들인다.

주저할 틈이 없었다. 알파미에 물을 붓고 죽처럼 끓여서 억지로 먹었다. 초코차와 연유를 보온병 2개에 담고 2명이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를 챙겼다. 아이스액스 4자루, 9mm 로프 60m, 스크류 5개, 카메라, 후원사 깃발, 파워젤 6개, 물. 고민 끝에 우모복은 놓고 가기로 했다.

출발 준비를 마치니 오전 2시15분. 독일팀은 잠들었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둥근 달은 건너편 능선을 환하게 비추었고, C2의 실루엣은 말할 수 없이 평온해 보였다. 조금만 걸으면 저 달은 우리의 갈 길을 비추어 줄 것이다. 독일팀을 기다리느라 눈도 못 붙인 김형주 선배가 앞장서 걸었다. 난 그 뒤에 그림자처럼 바짝 따라 붙는다. 밤 공기는 차갑지만 상쾌했다. 얼어붙은 눈에 부딪히는 아이젠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20분쯤 가니 가파른 경사가 시작됐다. 얼마 걷지 않아 아이스액스 두 자루를 꺼냈다. 두 팔과 두 발을 이용해야 했다. 경사가 가팔라질수록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피켈 한 자루로 걸을 때는 늘 하던 대로 걸음수를 세 본다. 5,000m에서 적용하던 30걸음이 점점 힘들어진다. 20걸음을 세고 심호흡 다섯 번을 크게 한다. 다시 20걸음, 15걸음, 10걸음,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어느덧 확보지점에 다다르면 선배님이 다시 앞장선다. 이 동작들을 수없이 반복한다.

▲ C2에서 정상 가는 길.

어느새 까만 밤공기가 파란 새벽공기로 변해 있다. 반복적으로 세고 있던 발걸음 수는 더 이상 10을 넘지 못한다. 한 걸음만 더 걷고 쉬자. 가파른 경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저만치 가면 잡힐 듯한데 또 그만큼 물러서 있다. 어느덧 환하게 날이 밝았다. 배낭 2개를 하나로 만들어 짊어졌다.

C2를 출발한 지 6시간이 넘었다. 정상이 보이는데 갈 길은 줄어들지 않는다. 둘만의 거친 숨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깨며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뿐이다. 쉬지 않고 걸었다. 아니 앉을 곳이 없었다. 피켈에 기댄 채 호흡을 가다듬는다. 아직은 견딜 만하다. 10시간쯤 걸었나보다.

마침내 정상 부근의 혼합지대가 보인다. 몇 년 전쯤에나 설치했을까. 곳곳이 너덜해진 하얀 꼰 자일이 보인다. 6~7피치를 더 올랐을 때 정상이 보였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15m의 눈이 하나도 없는 직벽이었다. 어느 곳으로 갈까. 오래된 로프에 어센더를 걸고 최대한 체중을 실으며 위를 살폈다.

“우두두둑~.”

갑자기 앞에 있던 김형주 선배가 멀어지면서 추락하고 말았다. 내 몸은 거꾸로 뒤집혔고 눈을 떴을 때 하늘 밑으로 이중화를 둘러싼 까만 스패츠가 보였다. 하얀 세상이 눈부셨다. 모자와 선글라스는 이미 날아간 상태였고, 잠깐동안 멍하게 있었다. 위에서 무전을 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손발을 움직여보니 괜찮았다. 두 번 부딪힌 허리는 고통스러웠지만 자세를 바로 잡았다. 김형주 선배가 애타게 나를 부른다.

“미영아, 미영아!”

호흡을 가다듬고는 “괜찮아요. 올라갈 수 있어요” 외친 다음 옆구리에 차고 있던 아이스액스 두 자루를 다시 들었다. 몇 번 휘둘렀는데 “어센더로 올라와”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참 그렇지, 그러면 되겠구나’. 다시 어센더로 추락한 만큼 힘겹게 60m를 올라갔다. 배낭 속에 있던 카메라가 박살났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올라와서 보니 오래된 하켄과 새로운 빨간 색 너트가 5mm 슬링에 묶여 있었다. 저것들이 나를 저 밑 몇 천m 빙하 속으로 빠지지 않게 해주었던 것이었다. 배낭을 벗어놓고 마지막 15m 암벽을 피크로 긁으며 정상에 올랐다. 설 곳이 없어 양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옆을 보니 끝도 안 보이는 천길 낭떠러지다. 후원사 깃발을 들고 억지웃음을 짓는다. 다행히 카메라는 괜찮았다.

“정상에 선 기분이 어땠어요?” 아무렇지 않게 선배들께 묻던 바보 같은 질문.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머릿속에는 오늘 중으로 C2에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이미 13시간을 걸었고 부딪힌 허리가 아파왔다. 오후부터 비가 내릴 거라는 기상예보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늘은 이미 회색빛으로 얼굴을 바꾸고 있었다.

등반방향을 제시해 준 최초의 높은 산

▲ 베이스캠프에 모인 대원들. 왼쪽부터 류정병 대원, 윤재학 등반대장, 이용대 대장, 김형주, 필자, 이종욱, 송석원 대원.
연결한 60m 로프를 가장 험한 곳에 고정시켜 놓고 각자 내려왔다. 이젠 무서울 것도 없었다. 새벽에 얼어 있던 눈은 녹아서 무릎까지 빠졌고 심지어는 허벅지까지도 빠졌다. 선글라스와 장갑을 잃어버린 김형주 선배는 중간에 놓고 온 배낭에 여분의 장갑이 있다면서 쏜살같이 내려가신다. 밤부터 비 소식이 있으므로 하늘은 이미 먹구름으로 덮여 있다. 또다시 걸음 수를 세기 시작했다. 오른쪽 발목이 아파온다. 주저앉아 쉬어도 이미 극도의 피로가 쌓인 육체는 쉽게 말을 듣지 않는다. 경사가 급한 곳은 거꾸로 클라이밍다운을 하기도 한다. 앞서가는 선배가 저 만치서 나를 기다리신다. 최선을 다해 걷는데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사방에서는 어둠이 엷게 깔리기 시작했다. C2에서는 나의 추락소식을 듣고 구조하러 출발했으나 여분의 스크류와 아이스액스가 없어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로프가 없었으므로 그냥 클라이밍다운을 해야 했다. 이종욱 선배가 밑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두렵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선배 강사들은 정오에 C2에 도착해서 쉬고 있다가 내 추락소식을 들었으나 피곤한 몸과 부족한 장비에 안절부절했다. 힘든데도 불구하고 구조하러 온 선배강사들이 너무 고마웠으나 표현할 여유가 없었다. 밤 8시에 C2에 도착했고 양쪽 다리에 근육통이 일어났다. 이종욱 선배가 계속 주물러 주었고 저녁 먹을 힘도 없이 그냥 누웠으나 허리 통증으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설원을 가로지르며 드리피카로 향하는 대원들

새벽에 일어나니 눈보라가 친다. 날씨만큼이나 내 허리도 변덕이 심하다.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오늘 BC까지 가기는 무리일 테니 천천히 C1까지만 가자고 한다. 최소한의 무게만 지고 힘겹게 올라왔던 길을 글리세이딩으로 내려갔다. 재미있다. 다시 C1에 모인 선배강사들은 갈라지고 터진 입술에 얼굴까지 부은 짐승(?)의 모습을 촬영해 두었다. 원하지 않았지만 여자짐승도 찍어둬야 한다기에 억지로 웃었다.

하루 머문 다음 날 너덜지대, 암벽 트래버스, 크레바스를 다시 걸어 8시간만에 BC에 도착했다. 저만치 이용대 교장선생님이 마중나와 계신다. 5박6일 동안 얼굴이 많이 상하셨다. 등정 이후 배터리가 없어 교신이 끊긴 상태여서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포터들이 나를 에워싸며 노래를 부르고 악수를 청하며 꽃다발을 안겨준다. 

가이드인 애시랍이 쿡에게 부탁해 초콜릿 케익을 만들었다. ‘드리피카 등정 축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제야 실감이 난다. 눈에 감동의 물기가 전해진다. 화살촉처럼 뾰족한 정상이 멋져 택한 드리피카는 참 멀고도 험했지만 나에게 많은 생각과 앞으로의 등반방향을 제시해 준 최초의 높은 산이었다. 두 사람만의 정상등정이 아니라 코오롱등산학교 강사원정대 모두가 함께 오른 한국 초등으로 좋은 기억과 멋진 경험을 남겨준 교장선생님을 비롯해 선배강사들께 감사드린다.

K7 BC를 뒤로하고 차라쿠사 빙하 위를 걸어 내려오는 동안에도 눈사태는 여전히 계속됐다. 나란히 같이 걷던 선배들께 말했다.

“선배님, 앞으로는 저를 알피니스트라고 불러주세요.”

고미영 대원
사진 김형주 대원

정보

K7은 1978년 일본 초등, K6는 아직 미등
 
▲ K7 전경. 왼쪽이 서봉, 가운데가 모포(Mofo), 오른쪽이 정상(6,973m)이다.
 
K7(6,934m)는 1978년 일본의 아키야 이시무라가 북릉으로 초등하고, 2004년 7월 미국의 스티븐 하우스가 단독으로 재등하며 그 해 가장 뛰어난 등반을 한 산악인에게 주어지는 황금피켈상을 수상했다. 왼쪽에는 K7 서봉, 가운데의 모포(Mofo·우르두어로 ‘여자와 남자’라는 뜻), 오른쪽이 K7 정상이다. 리틀 카라코룸(Little Karakorum)으로도 불리는 K6(7,282m)는 아직 미등인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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