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을 최단 거리로 잇는 물류 혁명의 현장 | ||||||||
누구보다도 이집트를 사랑했고 그래서 친구도 많았던 레셉스는 그곳에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로를 만들고 싶었다. 자기 손으로 동과 서를 잇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그가 이집트 땅을 처음 밟은 20년 전부터 갖고 있던 것으로, 1852년엔 그런 계획을 아랍어로 번역하여 당시 이집트 최고 권력자인 압바스 파샤 등 요로에 전달한 바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 왕조시대부터 존재했고 한때는 아랍 상인이 주요 교통로로 사용했으나 1200여년 전 폐기된 수로를 다시 건설하겠다는 그의 아이디어에 대해 모두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1798년 이집트를 찾았던 나폴레옹도 꿈꾸었던 것이었는데도. 1854년 여름 어느 날 아침, 신문을 펴든 레셉스는 압바스 파샤가 사망하고 무하마드 사이드가 그 뒤를 이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사이드는 그의 후원자이자 친구였기에 그 순간, 꿈이 현실로 바뀔 날도 머지않았다며 오랫동안 품어왔던 꿈을 다시 한번 그려보았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부영사 시절 왕세자인 사이드에게 스승 노릇을 했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곧 신임 태수(太守)에게 축하전보를 보냈다. 그리고는 이집트로 날아가 서로의 우정을 확인했다. 그에게서 운하계획을 들은 사이드는 들뜬 목소리로 두 손을 꼭 쥐었다. 운하 공사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대형 프로젝트라 통치권자의 결심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지만 1859년 일단 공사에 들어갔다. 노선은 지중해의 포트사이드(사이드 태수를 기념해서 세운 항구도시)에서 시작하여 팀사호(湖)와 대염호(Great Bitter Lake)를 관통하여 홍해변의 수에즈에 이르는 총연장 116㎞로 결정됐다.
하지만 개통식 전날 밤 시운전 중이던 배 한 척이 포트사이드 항에서 좌초되는 사고가 일어나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 때문에 개통식이 연기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날 결혼식을 올려 진짜 신랑 노릇을 하고 있던 레셉스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각국에서 온 축하 선박이 막 사고지점으로 다가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황급히 현장으로 달려가 좌초된 선박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는 길을 열어 개통식은 예정대로 무사히 치러졌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그 전까지 아프리카 남쪽의 희망봉을 돌아가던 선박들은 지중해를 거쳐 곧장 인도양으로 갈 수 있게 됐다. 부산에서 로테르담(네덜란드)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면 희망봉 경유시 2만7000㎞가 되는데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면 2만200㎞로 줄어든다. 시간적으로도 1주일을 벌고 들어가 지금에 이르러선 전세계 물동량의 14%를 점한다. 그만큼 이 운하가 갖는 의미는 ‘물류혁명’이란 말로 표현될 정도로 중차대하다. 인간은 원래부터 지름길을 찾는 존재들임을 그는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레셉스는 수에즈운하 개통으로 명성을 얻었고 이 덕분에 1873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1884년엔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한림원) 회원이 됐다. 그런데도 그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았다. 다시 파나마운하 건설(길이 82㎞, 1914년 개통)에 나섰다가 경영부실로 파산하여 잔뜩 빚을 졌고, 이로 인해 정신착란을 얻어 한동안 고생하다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운하란 선박의 항해나 관개 목적으로 건설한 인공수로로, 대부분 육지를 굴착하여 만든다. 여기에는 수평운하와 갑문운하가 있다. 수에즈운하는 그리스의 코린트운하나 중국의 수양제(煬帝)가 개착한 대운하처럼 수로에 고저(高低) 차가 없는 수평운하에 속하나, 파나마운하는 수위 조절을 위한 갑문이 여러 개 설치돼 있는 갑문식 운하다. 특이한 예로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가 있는데, 해상에 건설된 도시라 수많은 운하가 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규모 운하 건설은 18~19세기에 집중됐다. 산업혁명에 따른 물동량의 증가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운하시대를 이은 게 철도시대이고, 또 항공시대였으니 운하는 이들의 선구자 노릇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수에즈운하의 개발권은 처음부터 프랑스에 주어졌다. 그들이 자금을 댔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경쟁관계에 있던 영국은 이를 못마땅하게 보고는 운하회사의 주식을 사들여 프랑스와 공동 소유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상태는 군사혁명으로 권좌에 오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1956년 운하를 국유화할 때까지 지속됐다. 그때부터 운하 수입은 이집트 국고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967년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6일 전쟁’이 일어나 운하가 폐쇄되는 상황을 맞았지만 이집트가 시나이반도를 탈환한 뒤로는 재개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수에즈운하는 이집트의 현대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카이로에서 성지 시내산(시나이산)으로 갈 때도 운하를 지나게 된다 이때에는 아흐마드 함디 터널을 통과하므로 수로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단지 지금 운하 밑을 지나고 있구나 하고 느낄 뿐이다. 예로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갈라왔던 시나이반도는 그 때문에 두 대륙을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해주었다. 모세도 이 길을 통해 이집트를 탈출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동(출애굽)했으며, 어린 예수 또한 위험을 피하고자 이 길을 통과해 잠시 이집트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던 기록을 갖고 있다. 그들은 모두 반도를 종단했다. 그러나 이제는 반도 서쪽 끝의 지협에 난 수에즈운하가 유럽과 아시아를 최단 거리로 이어주고 있다. 이를 두고 역사의 진화라 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세상은 보면 볼수록 재미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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